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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2:1-8(22.07.26.화)
은혜바라기
2022. 7. 26. 07:40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어제 11장에서 아가보의 흉년 예언이 ‘먹거리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죠. 박해로 인한 ‘복음 흉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연이 말씀에 순종하여 진짜 ‘먹거리 흉년’이 나타나긴 했죠.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의 의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12장의 시작이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라는 박해(흉년)로 시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보의 예언이 이제 뜬금없는 문맥이 아니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시죠?
2절 야고보가 죽습니다. 정말 정말 신기하게도 성경은 인간의 순교를 가능한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너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지은 책들에서는 인간의 순교를 매우 잘 포장해서 드러내죠. 인간은 인간을 우상화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늘 야고보의 죽음도 너무나 간단하게 표시만 하는 정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베드로가 옥에 갇히는 에피소드가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하죠.
1절부터 3절까지도 매우 심오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헤롯 왕은 인본주의를 가리킵니다. 인본주의는 항상 신본주의와 대립하죠. 그래서 야고보를 죽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한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정체성은 ‘인본주의 종교인’을 뜻합니다. (즉, 인본주의 종교인과 복음의 갈등과 박해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셔야 합니다.)
베드로도 잡혔지만 무교절이기 때문에 일단 옥에 갖히게 되죠. 재미있게도 인본주의 종교인들의 율법에 의해 베드로가 살게 됩니다. 그런데 더 깊은 본질은 성령께서 이 잘못된 율법 해석을 이용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령께서 베드로가 옥에 갇힌 에피소드를 통해 복음의 어떤 것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깊이 묵상하겠습니다.
‘옥’은 바로 인생을 뜻합니다. 지옥을 뜻하기도 합니다. 땅 지 묶일 옥, 즉,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인생이 바로 지옥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진 인간은 바로 ‘옥’에 갇힌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여기에 다 해당이 되죠.
이때 ‘군인 4명씩 4패’라고 되어 있죠. 4가 두번 강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4’는 동서남북, 즉 땅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 기간이 무교절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죽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한 4절 후반 절에 보면 ‘유월절 후에 백성 앞으로 끌어내고자 하더라’라고 되어 있죠. 베드로가 유월절이기 때문에 죽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또 강조합니다.
유월절은 1월14일이고 무교절은 그다음 날인 15일부터 일주일을 말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유월절과 무교절은 같은 명절로 묶어서 이해하면 됩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로 인해 사망(장자의 죽음)이 넘어간 것을 기념하는 날이죠. 즉, 베드로는 이 땅(감옥, 숫자 4)에서 예수님의 피로 지금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문맥의 앞(무교절)과 뒤(유월절)에서 두 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를 다시 정리해 보죠. 하나님이 이 세상(4)에 선택된 자들(베드로)을 보내셔서 복음을 가르치시려고 인생이라는 ‘옥’에 가두어 두셨지만 이 자들은 예수님의 피(유월절, 무교절)로 인해 그 생명을 보호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5절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여기서 교회의 정체는 바로 예수님(성령님)입니다. 복음은 ‘한몸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끝없이 기도와 간구, 그리고 중보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눈을 가진 자들은 이 5절의 ‘교회’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러나 이 눈이 없는 자들은 ‘오늘도 내가 새벽에 기도해서 노력해야만 내 친구 홍길동이 감옥에서 나온다. (구원을 얻는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6절에서 베드로를 표현한 것이 바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를 표현한 것입니다. “밤(=인본주의 : 빛이 없는 시간, 즉 예수님이 없는 세상)에 두 군인(인본주의의 강력함)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인보주의에 묶여 있는 모습) 누워 자는데( 영적으로 죽어 있는 모습 ) 파수꾼들이 문 박에서 옥을 지키더니 ( 절대 인본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 너무나 정확하고 치밀하게 베드로를 통해 우리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성령님의 의도가 보이세요? 너무나 절망적인 우리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걱정 마세요. 7절에서 드디어 성령께서 일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7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성령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셨죠.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감옥이라는 우리의 인생에 빛 되신 예수님이 소개되고 있는 상황을 뜻합니다.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강하게 치신다고 하십니다. 옆구리는 교회(여자)의 탄생장소, 즉 아담의 옆구리를 의미합니다. 즉, 선택받은 자들(=교회)만 쳐서 깨운다는 것입니다. ‘급히 일어나라’라는 말은 구원의 긴박성을 나타냅니다.
구원의 긴박성에 대하여 잠깐 묵상을 해보죠. 사람이 가장 간과하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것을 듣는 자들은 신기하게도 느긋합니다. 대부분 ‘뭘 꼭 그렇게 까지 생각을 해~~~’라고 하면서 회피하죠. 하지만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자세는 ‘긴박성’입니다. ‘급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 이 부분만 ‘급하게’ 생각을 하시죠.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는 말씀은 결국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나의 자아가 자유를 얻어 복음의 진영으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띠를 띠고’ 는 성령께서 끌고 가기 위한 띠를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성도의 견인’이라는 뜻이죠. ‘신을 신으라’도 긴박성을 나타냅니다. 즉, 성령께서 이끌 때 주저하지 말고 달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에서 겉옷은 말씀의 본질을 말합니다. 이 부분도 조금 더 묵상을 해보죠.
“마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이 말씀을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착한 사람,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자’ 정도로 알죠. 이 정도로 현재 기독교는 복음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가 이런 식의 인본주의 종교에 십자가라는 신을 모셔 놓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죠. 그렇다면 ‘고발’이라는 단어도 뜬금없는 문맥이라는 것을 눈치채야 합니다. 오히려 범죄자가 합의할 때에는 장롱 속에 감춰놓은 패물이라고 갖다 주면서 아부해라~~ 라는 문맥이 어울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충고를 할 리가 없죠.
이 때 ‘고발’은 바로 율법이 나를 고발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율법은 나를 늘 죄인으로 만들죠. 그래서 속옷의 의미인 ‘말씀의 포장지’, 즉 ‘율법을 잘 지켜라’를 지키려는 자에게 겉옷의 의미인 ‘말씀의 본질’인 복음을 가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이 부분을 헷갈려하는 이유가 바로 속옷과 겉옷이 반대 개념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착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동지방에서는 속옷이 그냥 입는 옷 정도라면 겉옷은 태양과 추위에서 생명을 보호하는 중요한 옷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속뜻, 겉 뜻의 개념으로 보시면 안 되고 말씀의 중요도로 보셔야 이해가 되는 구절입니다.)
베드로의 옥중 에피소드는 너무 길어서 한번에 못하고 두세 번 나누어서 묵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