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완료)

창29:1-10(23.05.16.화)

은혜바라기 2023. 5. 16. 08:43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야곱은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동쪽은 죄의 땅을 가리킵니다. 신본주의를 떠난 인본주의를 가리키죠. 그래서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동쪽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묘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땅에 오신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오셨을까요? 그분의 신부를 찾아오셨죠. 그 이야기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2절에 나오는 ‘우물’은 물을 담고 있는 곳을 의미하고 '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양 세 떼가 누워있다고 나오죠. 양은 교회를 가리키고 숫자 ‘3’은 하나님의 숫자, 즉 복음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인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에게 복음을 먹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양 떼들이 우물의 물을 먹지 않을 때에서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막는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즉 복음은 오직 선택된 자들, 즉 교회에게만 허락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절대 복음을 알 수가 없도록 큰 돌로 막아 놓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절부터 보면, 야곱이 목자들에게 ‘어디서 왔는가? 라반을 아는가? 그는 평안한가? ’라고 묻죠. 목자들은 하란에서 왔고 라반을 알고 그가 평안하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실 때 아무 때나, 누구나 구원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구원할 대상을 정확히 알고 찾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가 ‘평안’에 거하고 있는 자여야 합니다. 

 평안(평강)은 샬롬이라고 하죠. 우리는 ‘평강’의 뜻을 대부분 ‘편안함’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이 '편안함'은 참 평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허락하신 ‘감정’일뿐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창세기 1장 2절에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창1:2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땅이 혼돈한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모든 질서가 다 무너져서 혼돈만 남아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절대 고독, 절대 공허만 남아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오직 흑암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상태를 ‘평강이 없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데 창1:3절에 보면, 드디어 빛 되신 예수님께서 오시죠.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래서 이 땅은 예수님의 새로운 구속사의 역사가 시작되죠. 이것이 바로 복음에 기초한 참 역사관, 참 세계관입니다. 

 결국 ‘평강’이란 빛이 오셔서 ‘혼돈, 공허, 흑암’을 몰아낸 상태를 말합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혼돈, 공허, 흑암’은 인본주의 대표적인 속성이죠. 그래서 결국 인본주의와 분리되어 복음의 진영으로 넘어온 자들을 가리켜 ‘평강’에 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시죠?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샬롬’입니다. 그러면 ‘지혜’와 ‘평강’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평강이란 인본주의와 분리되어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간 상태를 말한다고 했죠. 그렇다는 것은 성령께서 선택된 자에게 복음을 잘 가르치셨다는 말이고 선택된 자는 그것을 잘 알아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의 뜻은 ‘잘 알아듣다’라는 의미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이 세상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선택된 자들(교회)에게 복음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그 목적을 다하면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창조와 멸망은 한 세트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설명하려고 만든 온 천하만물은 그 본질이 오직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아듣게 된 자들은 인간 생, 노, 병, 사의 모든 의미와 모든 인류역사의 본질을 전부 복음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은 지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아기 엄마 찾아주기’ 에피소드를 잘 알고 있으시죠?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50%밖에 이해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짜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었다고 판단을 해야 할 부분은 ‘아기 엄마를 찾아준 그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창녀들의 말을 잘 들어 준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 왕국이 가장 부강할 때였습니다. 나라가 거의 제국화 되었죠. 일반 대신들조차 솔로몬 왕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당시 인구의 숫자에도 넣지 않았던 여자, 더구나 그런 여자 중에서도 창녀라는 신분의 두 여자를 궁 안으로 들여서 대면하여 그녀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잘 들었죠. 하나님이 무엇을 이야기하시려는지 조금 보이시나요? 지혜란 ' 잘 듣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잘 듣는 것’이 지혜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결과론적으로 ‘아이 엄마 찾는 묘수’를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넣어 두신 것뿐입니다. 즉, 편견없이 잘 듣고, 분석하고, 고민하면 참 실체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체를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수 천 가지 묘수가 생각이 날 수 있죠. 그러나 그 묘수 자체는 그리 신박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편견 없이 정말 잘 듣고 고민하게 되면 실체(예수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인본주의 편견 때문에 절대 복음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흘려듣죠. 예를 들어 어떤 전도자가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했을 때, '에구~~ 또 시끄러운 종교인이 왔네~~'라고 '잡상인'취급을 하게 되죠. 솔로몬이 '내가 제국의 왕인데 그런 여자, 심지어 창녀, 심지어 비천한 가정사까지 다 들어주어야 하는가?~~' 였다면 '지혜의 왕 솔로몬'은 없었겠죠. 마찬가지로 복음을 잘 듣지 못하면 '평강'에 들지 못합니다. 

 이 솔로몬, 즉 지혜의 왕, 평강의 왕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말씀을 100% 온전하게 듣습니다. 이것을 ‘참 지혜’라고 합니다. 이제 지혜와 평강의 관계가 이해가 되시나요? 

 6절 보면, 그렇게 평강에 머물러 있는 라반의 가족인 라헬이 양을 몰고 온다고 나옵니다. 라헬은 교회, 즉 구원받은 백성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이제 왜 이렇게 연결이 되는지 그 방향성이 보이시죠? 

 10절 보면, 야곱이 라헬과 그 양들을 보고 우물 아귀의 돌을 옮기고 양 떼에게 물을 먹인다고 나옵니다. 이제 이 해석은 너무 쉽죠? 예수님께서 그 분의 신부인 교회를 발견하시고 막아 놓았던 하나님의 은혜, 즉 복음을 먹이신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