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완료)
눅11:47-54(24.01.10.수)
은혜바라기
2024. 1. 10. 08:35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47절, ‘선지자들’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정체성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부산을 가야하는데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그곳에 ‘부산행’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표지판의 색깔, 표지판의 크기, 표지판의 위치가 중요하지 않죠.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이 중요하고 그 방향이 가리키는 목표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그 표지판의 색깔, 크기, 위치 등을 가지고 지적하고 없애버린다는 것입니다.
말씀(율법)이 가리키는 것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말씀) 자체의 색깔, 크기, 기능이 자신들의 기준과 맞지 않다고 다 죽이고 바꾸고 없애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이런 일들을 해 왔고 지금의 바리새인들은 그런 조상들의 행위를 옳다고 여긴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가인과 아벨의 시대에는 육식이 허용된 시대가 아니고 오직 채식만 할 때였죠. 이때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을 키웠죠. 누가 더 열심히 키웠을까요? 생존이 달린 농사였기에 가인은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키운 곡식을 하나님께 바쳤더니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죠. 자기의 지극정성이 외면당한 것입니다.
반면, 아벨은 그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짐승의 가죽으로 나의 벗은 몸(죄)을 덮어 주셨단다~~' 라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그것을 계속 기념하는 종교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이 종교활동을 위해 사용할 양을 키우는 것이었죠. 고로 그리 많은 양을 키울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즉, 매우 고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죠. 그 이유는 이것이 복음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이유는 가인과 아벨의 행위(노력과 정성)와 아무상관 없습니다. 이 두 제사의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의 지극정성은 필요 없다. 오직 어떤 짐승의 희생만이 너희의 죄를 가릴 수가 있다는 '메시지'가 필요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짐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의 기준, 즉 자신의 지극정성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셨고, 힘든 일 없이 준비했을 뻔한 아벨의 제사만 받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아벨을 죽이죠. 이것이 인본주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에피소드조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인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오히려 교회에서 활동이 많이 줄어들게 됩니다. 반대로 종교인들은 점점 더 훌륭한 신앙인이 되려고 많은 활동을 하게 되죠. 이런 과정 중에 종교인들은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을 박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에게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는자들도 막는다’라고 합니다. 말씀은 행위(교훈, 종교)로 포장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종교라는 포장지에 쌓아서 주셨죠. 그러나 종교는, 즉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복음을 빼고 포장지(행위)만 가르쳐서 자신과 신자 둘 다 지옥에 빠져버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53-54절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박해하려고 달려드는 모습이 나오죠. 표지판(선지자)도 꺾어 버리는데 그 목표인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겠죠. 행위는 복음을 꺾고 반대로 복음은 행위를 꺾습니다.
그러나 방향성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종교 행위를 하지말자~~‘ 라는 것도 비행위라는 행위의 범주일 뿐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게 되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같이 애굽과 분리되어 광야로 나아가게 됩니다. 즉, 인본주의 실체를 알게 되어 그것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 즉 집, 학교, 직장, 가족, 교회를 다 버리고 살자~~ 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 집, 학교, 직장, 가족이 모두 광야 같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가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집, 직장, 가족, 교회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복음을 알게 되면 참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맛나’에만 의존하며 살게 됩니다. 맛나의 정체는 예수님이죠. 그렇다고 ‘그래 오늘부터 가족들을 모두 무의미하게 생각해야겠다~~’ 도 아닙니다. 이것은 불교식 사고방식입니다. 모든 것을 마음에서 버리는 무소유를 훈련하자~~라는 방식이죠. 어렵죠? 그래서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조금씩 내 주변 사물, 질서, 관계들을 광야처럼 만들어 가면서 오직 맛나이신 예수님만 먹으며 살 수 있게 진행시키시죠. 내가 미리 이것을 알았다고 학교도 내 팽겨 치고 가족들도 무의미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자식이 나를 배신하고, 친구도 나를 배신하고 환경도 나를 배신하고, 나도 나를 배신하고, 늙고 비참해지면서 점점 삶이 광야같이 되어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발버둥 치지만 선택받은 자들은 반대로 그런 내가 부인되어 가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나만 남게 되죠.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선택받은 자들은 매우 소수(적은 수)라고 성경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