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완료)

눅14:1-6(24.02.19.월)

은혜바라기 2024. 2. 19. 08:19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원수지간인데 어떻게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예수님이 가셨을까? 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이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시겠죠? 예수님은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 자리라면 그 어디든 가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또한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 있죠. 

 오늘의 주제는 쉽습니다. ‘종교적 모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수종병은 배 안에 물이 차는 병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병든 자’라는 의미로 아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것을 복음으로 풀어 보면, 인본주의라는 근본적인 병을 치료하시러 오셨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된다는 율법 때문에 치료라는 일을 하지 않죠. 그런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이것을 규정한 특별한 법이 없기 때문에 이때에는 아들과 소를 건져냅니다. 그들이 만든 율법 안에서 그들 스스로 모순에 빠져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설명하시려고 이렇게 일부러 안식일에 종교인들의 집에 와서 그들의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종교인들은 이렇게 모순되는 상황에 빠져들까요? 이유는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 의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고 쉬라고 한 이유는 그 안식일이 가리키는 것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즉, 안식일의 정체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구원은 예수님 홀로 완성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에 단 1도 보탤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안식일이라는 율법으로 설명하신 것이죠. 

 그런데 지금도 일요일을 주일이라는 날로 바꾸고 심지어 그 날을 성스럽다고 치장하여 ‘주일성수’라는 단어를 만들어 냅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일요일에는 돈도 쓰지 말도록 교회에서 교육했죠. 그리고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를 목숨 걸고 지키라고 교육했죠. 구약의 어리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2천 년 전의 바리새인들이나 지금의 교회나 모두 다 똑같습니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종교인’이기 때문에 늘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으로 규칙과 프로그램을 만들어 쌓죠. 심지어 ‘기도를 쌓는다’라는 불교식 논리까지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안식일을 완벽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의 정체성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월화수목금토일 매일 예수님의 품 안에서 그 자리를 지키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품으신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날 옆집 여자를 강간하고 그 남편을 살해하고 경찰소에 가서 거짓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은 이 순간에도 예수님의 품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 죄를 저지르면서 잊고 있죠. 그러나 어느 순간 성령께서 복음으로 조명하시면 ‘아~~ 나는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 존재였지~~’라고 다시 깨닫게 됩니다. 죄를 지를 때 예수님의 품 밖에 있다가 내가 깨닫는 순간 다시 예수님의 품 안으로 들어오는 메커니즘이 아닙니다. 종교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죠. 그들의 ‘행위’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안 좋은 예를 들었을까요? 사실 이 예는 너무나 유명한 다윗의 에피소드입니다. 다윗은 어느날 그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강간하죠. 그리고 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합니다. 그것을 자신의 부하에게 거짓말을 시켜 지시합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성령의 도구)가 와서 복음을 이야기하자 ‘회개(다시 세상을 복음으로 보게 됨)’하죠. 똑같죠? 이때 다윗이 죄를 지을 때 구원의 밖에 있다가 회개를 할 때 다시 구원 안으로 들어오는, 왔다리 갔다리 매카니즘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자들이나 유기된 자들이나 모두 교회라는 도구 안에 들어가 종교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모두 인본주의 삶을 살게 되고 모두 죄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다윗에게 온 나단 선지자와 같이, 성령께서 오셔서 복음으로 조명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때 선택받은 자들은 '정말 예수님이 아니라면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엄청난 종교의 함정에서 , 죄의 함정에서 과연 누가 빠져 나올 수 있을까~~' 라고 알게 되면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