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2장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많은 방언들, 랄랄라 같은 기초방언, 샤프라케르바 같은 고급방언등이 과연 하나님이 주신 영적 언어일까? 정답부터 말씀드리고 묵상을 시작하죠. 정답은 “아닙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하나님이 주신 영적 언어로써의 방언은 단언컨데 없습니다.
그럼 성경에 나온 오순절 ‘방언’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의 본질 부터 접근해야 합니다.
천지창조와 모든 인류 역사는 전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시적인 공간과 시간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이 세상에 계획하고 실행시킨 스토리인 것이죠. 대략 80년 사는 우리의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복음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복음을 깨닫는 것을 ‘눈을 뜬다’ 혹은 ‘믿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이고 이것을 고백하는 것을 ‘하나님께 영광 드린다.’라고 하는 것이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 상태를 ‘평강’이라고 합니다. 고로 신약의 모든 서신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다'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알려 주시는 방법은 전부 비유와 상징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선택된 자들에게만 알려주시기 위함이고 둘째. 유한한 존재인 사람에게 무한한 개념인 하나님의 복음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의 모든 것과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은 전부 비유 (문법기술적인 비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지판의 기능으로써의 비유) 입니다. 예를 들어 육체의 죽음 조차도 비유입니다. 육체에 죽음을 부여하여 우리로 하여금 ‘죽음 너머의 세상’에 대한 묵상을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죠. 죽음을 직, 간접적으로 목격하면서 우리는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죠. 이렇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복음을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방언’도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방언의 사전적 의미는 같은 지역 사람들만 알아듣는 그들만의 언어라는 뜻이죠. 고로 방언이 설명하고자하는 바는 ‘복음은 천국을 고향으로 둔 선택된 자들만 알아듣는다~~’는 의미입니다. ‘천국 시민이 말하는 것은 오직 천국 시민만 알아 듣는다’라는 뜻이죠.
즉, 방언은 하나님의 예정설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말씀 안에 복음을 담아서 이야기 해도 그것을 듣는 자와 못 듣는 자로 나누어질텐데 그 이유는 그 자의 믿음, 노력, 설득, 이해, 정성,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천국 시민으로 태어난 자들만 그 자의 탄생지역인 천국언어인 복음을 알아 듣게 되는 것’을 ‘방언’이라는 도구를 통해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표지판으로 설명하신 것이죠.
사도행전을 보면, 방언이 “하늘에서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모양”으로 임했다고 하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모양’이라는 것은 ‘복음은 말씀(혀)이다.’라는 것을 성령께서 ‘혀의 모양 = 말씀’ 이라는 시청각 자료로 형상화 하시여 유치원생 가르치듯이 설명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후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여 각기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죠. 그리고 같은 곳에서 난 사람들만 그 말(방언)을 알아 듣죠. 즉, ‘천국에 속한 자만 천국 언어인 복음(방언)을 알아 듣는다’를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물론 중의적인 뜻도 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에게 국한하지 않고 많은 민족에게, 많은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기도 하죠.
성경은 복음에 대한 설명서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완성 되었죠. 성경은 복음에 대한 설명을 완벽하게 완성했다고 선언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외부의 그 어떠한 특별한 기적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외부의 기적이 필요하다면 성경이 복음을 설명하기에 불완전하다는 논리가 되므로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구약과 신약의 역사에서는 성경의 올바른 방향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기적이라는 형광펜을 간혹 사용하셔서 개입을 하셨죠.
사도행전2장 시대에는 아직 성경이 완성 되지 않았으므로 온전한 복음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언 에피소드’를 사용하셔서 복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심지어 형상이 없으신 성령께서 ‘불의 혀’모양으로 연출까지 하시면서 설명하셨죠. 만약 지금도 방언 기적을 사용하신다면 이렇게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완벽한 방식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실 때에는 항상 ‘확실하게’ 하시는 특징이 있습니다. 기드온의 양털 사건 기억하시죠? 양털이 젖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 하겠다고 했다가 다음 날 반대로 양털만 안 젖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다고 했을 정도로 하나님을 시험한 기드온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응해 주셨죠. 출애굽 시절에는 애굽의 항복과 유대인의 믿음을 위해 10가지 재앙을 준비하셨던 하나님의 기적을 기억하시나요? 절대 어설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에피소드에서도 성령께서 불의 혀의 모양으로 보여주시고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외국어로 방언을 말하게 하셨고 이것을 온 천하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전부 확인하는 상황을 연출하셨죠. 하나님은 이렇게 기적으로 복음을 설명하실 때 ‘ 완벽하고 확실하게 ’ 하십니다. 어설픈 무당의 작두질 보다도 불확실한 ‘랄랄랄’방언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럼 현재 ‘방언’을 실제로 하시는 분들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일단 먼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방언이 기독교에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방언은 어느 종교에나 다 있습니다. 방언을 연구한 어떤 목사님에 의하면 타 종교의 방언을 녹음해서 기독교의 방언과 같이 들으면 거의 구분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런 방언은 타 종교 뿐 아니라 무당들에게도 존재하고 심지어 아프리카 토속 신앙에도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방언의 정체가 뭘까요? 아마도 이미 창조될 때 부여된 ‘인간의 능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노력하면 3개국어, 5개국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처럼 사람은 ‘언어의 재능’이 이미 창조되어 내재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동물과 격이 다르게 창조된 여러 재능 중 대표 재능이죠. 얼마나 뛰어난 재능이 부여되었겠습니까? 결국 기독교든, 무당이든, 아프리카 토속 신앙이든, 이 자들이 방언을 하는가? 안하는가?의 차이는 ‘말의 재능’의 차이와 그것을 촉발한 환경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방언(?)은 말을 많이 하다 혀가 꼬이면서 나오게 됩니다. 혹은 옆 사람의 방언을 들으면서 교육됩니다. 이후 방언을 스스로 훈련하여 새로운 발음을 만들어 더 많은 방언을 하게 되죠. 심지어 그런 의미도 없는 말을 하면서 거기에 의미를 넣어서 말하는 훈련까지 하게 되죠. 그리고 이것을 통역이라고 우깁니다.
간혹 외국어를 배우지 않았는데 진짜 외국어 방언을 받았다는 사람이 있죠. 갑자기 독일어를 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것이 있을 것입니다. 100% 거짓입니다. 천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매번 거짓으로 밝혀진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복음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절대 어떠한 특별한 기적도 베푸시지 않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복음의 방향성을 혼동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항상 ‘완벽하고 확실하게’ 하십니다.
오늘날은 과학과 메스컴이 매우 발달하여 하나님이 만약 기적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려고 하셨다면 더 완벽하고, 전 세계적으로, 더 확실한 증명으로 ‘외국어 방언’을 이용하여 설명하는 상황을 만드셨겠죠. 고작 몇 사람 통해 간간히 증명되지도 않은 간증으로, 그 중에 몇 명은 결국 결론 없이 사라지고, 몇 명은 사기로 들통나는 식으로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제발 하나님의 열심을 인간의 수준으로 판단하지 마세요. 기드온 처럼, 유대인 처럼 확실하고 철저하게 믿게 하신다니까요! 지금 그것은 오직 '성경' 뿐 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없는 방언은 필요 없다. 방언은 언젠가 그친다.” 라는 것이 주제죠. 방언이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써의 의미만 가진다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복음이 설명되면 방언은 그 역활이 끝난 것이므로 방언은 그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완벽하게 설명된 성경이 완성된 이후 방언은 그친다는 의미로 해석하셔도 됩니다.
고진도 전서 14장은 조금 더 심화된 방언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부족하니 예언을 하라’ ‘방언은 부족하니 통역을 해라’는 언급이 나오죠. 전부 다 설명할 수는 없으니 바울이 말하는 공통된 뜻만 설명드리겠습니다. 나중에 한 절 한 절 찾아 보시면서 여기에서 풀이 해 드린 것과 맞추어 보세요.
고린도 14장에서 바울은 왜 ‘방언’을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방언’의 부족함을 어필하는 이중적인 표현을 하는가? 이것은 방언 자체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 한시적으로 복음의 속성을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이 표지판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바울이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리키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나 성경이 완성되어 그 기능이 필요없게 된 경우에는 방언의 ‘기적과 같은 모양’에 묶여 버릴 수 있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표현을 독자인 우리에게 알려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방언이 ‘한시적인 표지판’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죠.
고전14장19절 하반절만 한번 다시 보죠.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깨달은 마음’이라는 것이 복음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을 뜻하죠. 이 복음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이제 표지판으로써의 방언은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복음이 전부 설명된 '완벽한 성경' 을 두고 '라랄랄'를 통해 구원을 또 다시 설명하신다???? 웃기는 말입니다. 이건 사기입니다.
결론을 맺죠.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시대에 하나님의 허락으로 잠깐 등장한 ‘방언’은 성경의 완성에 필요한 ‘상품을 담은 포장지’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포장지에는 그 상품에 대한 설명서가 쓰여져 있죠. 물론 여기서 상품은 ‘복음’입니다. 이 설명서에는 “천국백성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라는 문꾸가 있습니다.
지금도 새벽 시간에 랄랄랄, 아프라케롤바를 외치는 자들은 이 말들에 의미를 부여하여 ‘이상한 믿음’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야 내가 ‘믿음있는 자’가 되는 착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이런 심각성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렇지만 '한시적인 방언' 자체를 부인하면 성경 완전 전에 이루어 진 방언은 모순이 되므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방언에 대하여 한시적으로는 인정을 하면서도 성경완성 이후에는 부인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방언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영적 언어다' 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나를 기준으로 믿음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내 기준의 믿음’이라는 말이기 때문이죠. 여기에서 정말로 많은 잘못된 믿음이 파생됩니다.
오직 믿음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람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죠. 참 믿음을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오직 예수님만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믿음을 잠시 공유하는 것 뿐입니다.
고로 ‘예수를 믿으세요’라는 말도 복음적으로는 잘못된 말입니다. 이것을 복음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로 인하여 믿게 되어 구원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가 맞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존재하죠. 우리는 오직 은혜를 받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이런 사람들의 인생은 이미 태초에 정해져 있다고 하죠. 이것이 바른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 그러나 예정론과 숙명론(운명론)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