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도의 마지막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로 마무리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부분을 '수리수리마수리' 정도의 '주문의 완성'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실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나의 아들이 서울대 가게 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기도는 '나의 아들이 서울대 가게 해주세요.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의 뜻이 됩니다. 완벽하게 잘못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의 진정한 의미는 나의 기도를 검증하는 역활입니다.
부모가 암에 걸려 누워있다면 우리는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의 시간은 '예수님이라면 과연 이렇게 기도할실 것인가?'를 묵상하는 시간이 됩니다. 진정으로 이것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이 시간이 무척 길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실까?'를 온전하게 묵상하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아셔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복음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오직 복음만을 위해 생각하시고 행동하시죠. 그래서 복음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는 자들은 “과연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실까?”의 묵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와서 울며 부르짖는 많은 기독교인들 중 대부분은 헛고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한번 살펴보죠.
“ 마7:21상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 마7: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정말 무서운 말씀이죠? 그런데 이 말은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십계명의 제 3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우리는 십계명의 1,2계명은 대충이나마 이해합니다. 그런데 3계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1계명의 초점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 2계명의 초점은 ‘이러한 하나님을 너희 맘대로 상상해서 만들어 내지 말라’입니다. 그럼 3계명의 초점은 무엇일까요? 3계명의 초점은 하나님의 수준을 너희의 수준으로 떨어 뜨려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전부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본주의적 종교 패턴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패턴은 ‘인간이 신을 만들고 그 신에게 지극정성을 다 할수록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입니다.
그래서 이 인본주의 종교 패턴에서 나오는 신의 자리에 하나님을 집어넣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종교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정확하게 제 3 계명입니다. 불교에서 신의 자리에 부처를 모셔놓고 ‘부처님께 비나이다.비나이다.’하는 종교활동과 그 부처의 자리에 하나님 넣고 ‘주여 , 주여’ 하는 것은 동일한 종교활동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망령되다’고 하신 것이죠. 우리는 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셨던 이유는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 사람을 잘 따르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쫓았죠. 하지만 예수님은 이후 어떻게 하셨죠?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만약 현대 교회였다면, 현대 목사였다면 이 기회를 이용해서 대형교회(대형종교)를 만들었겠죠.
이제 기도에 대하여 한 눈끔 눈을 뜨셨죠? 그 한 눈끔의 방향성을 가지고 좀 더 기도에 대하여 알아 보죠.
그래서 기도는 복음에 눈을 뜬 자, 예수님을 아는 자, 예수님의 신부, 거듭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인 셈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된 자들만이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실까? 라는 묵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거듭난 자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옛자아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항상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거듭난 자들 조차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의 묵상을 완벽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가슴만 칠 뿐이죠. 그런데 이런 증상을 가진 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이런 모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지체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구절이 있죠.
“ 눅18:13-14상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
이제 기도의 본질에 대하여 아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남죠. 복음을 알아 갈 수록 오히려 기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제자들도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라고 묻게 되죠.
너무나 다행스럽게 당시 제자와 지금 우리의 고민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주기도문’이죠. 그런데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 주기도문 조차 주문으로 외우고 다니죠. 기도할 때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기도문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기도문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보죠.
주기도문은 우리가 평생 묵상해야 할 유일한 기도입니다. 가능한 주기도문에서 벗어난 기도는 하지 마시고 주기도문을 나의 삶에 비추어 깊게 기도하세요. 주님이 원하지 않는 기도를 넓게 하지 마시고 주님이 가르쳐 준 기도를 깊게 하시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선택받은 자들도 복음에 눈을 뜨기 전에는 자기 욕심과 꿈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그 기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예를 들면, 몇 년 동안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을 늘 기도했다고 해보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라면 그 꿈을 이루던, 못 이루던 간에 결국 '좋은 회사'라는 가치의 허상을 깨닫게 되면서 나의 기도가 ‘주기도문’의 내용으로 바뀌어 갑니다. 결국 예수님이라면 하실 수 밖에 없는 기도로 바뀌게 되죠.
유명한 한나의 기도를 아시죠? 한나는 아들이 없는 설움 때문에 늘 울면서 아들을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죠.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과 한나의 마음이 통했다’라는 중요한 구절 때문입니다. 한나는 처음에 자신의 아들없음(이 세상의 결핍)에 대한 기도로 시작했지만 하나님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말씀(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어서 매우 슬프신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그래서 한나는 자신의 슬픔이 하나님의 슬픔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결핍으로 시작한 기도였지만 복음을 알게 되면서 ‘주기도문’으로 바뀐 것이 바로 한나의 기도입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기도로 응답받은 자식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내놓죠. 그 사람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의 뜻이 '하나님께 기도'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아시겠죠? 모든 참기도는 결국 주기도문 영역으로 끝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묶여 있는 자들은 오직 이 땅의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주기도문은 평생 묵상을 해도 1%도 팔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여기서는 방향성만 잡으시고 평생 깊은 묵상을 하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여기서 하늘은 '예수님과 선택받은 자들(교회)'을 가리킵니다. 그냥 줄여서 '하늘=교회'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하늘은 천국을 가리키지만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과 선택받은 자의 관계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오직 선택받은 자들(하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며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들에게만 아버지가 되셔서 그 기도만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이 첫 구절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과, 그리고 기도를 듣는 분, 그리고 이 둘의 관계를 정확하게 규정짓는 말씀입니다. 종합해서 말씀드리면, '교회라고 불리는 선택받은 자의 기도만 들으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라는 뜻이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기도를 드리는 자의 목적이라는 것이죠. 더 확장시켜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것이 사람의 인생목적이라는 것이죠. 피조물인 인간이 사는 유일한 목적은 창조주인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어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예수님)을 사랑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정확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드린다.’는 것을 인본주의 방식대로 ‘높은 사람에게 무릎 꿇고 무엇인가를 바치는 것’와 같은 의미로 인식할 때가 많죠.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 피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이 해석하는 불완전한 사랑이 아닌 완벽한 사랑이죠. 그 사랑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만든 천지창조의 모든 계획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받으심이 바로 복음(사랑)이죠.
하지만 이 복음은 인간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를 견인하여 예수님의 품속에 넣는 것이 복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1도 없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바로 이 복음(사랑)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 끄덕하는 것 뿐 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영광드린다'고 하는 것이죠.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나라'는 시간의 개념을 넘어서는 '천국'을 말합니다. 이미 천국은 묵시 속에서 완성되어 있습니다. 천지창조는 선택된 자들이 어떻게 이런 천국에 올 수 있는지를 알게 하려고 만든 창조물입니다. 결국 선택받은 자들의 인생은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선택이 되어 천국백성이 될 수 있었는지 알려 주세요'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말씀이 주기도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죠. 주기도문은 ‘샌드위치’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을 가운데 두고 필요한 말씀들로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죠. 주기도문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한 말씀이 바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 땅에서 사람에게 필요한 의식주’로 알고 기도하죠. 땅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이 먹고 마셔야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죠. 이것을 역순으로 설명하면 우리가 먹고 마셔야 생명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우리는 말씀되신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진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예수님을 먹고(빵) 마시는(포도주) 성찬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늘 기념하라고 하신 것도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평생 먹고 마시는 음식과 물을 의미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루 세끼를 반복적으로 먹으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음식과 물을 통해 예수님만을 생각하시라고 하시는 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말씀이 가장 오해가 많은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내가 옆집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줘야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준다는 주고받기(give and take)로 받아들이시면 안됩니다. 이 말씀의 본질은 일용할 양식인 예수님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즉 ‘복음이 우리에게 왔으니’라는 뜻입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원래는 율법에 의하여 1개의 죄만 짓더라도 죄 지은 자는 모두 죽는데 이제 양식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복음이 이 세상에 들어와서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는 환경(세상)이 되었으니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세요’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부분이 주기도문의 마지막이죠. 이 부분은 양식되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고 구원받은 자들의 삶 이후에 대한 부분입니다. 즉, 구원받아서 복음의 진영으로 옳겨진 자들이라도 남은 인생을 자기의 옛자아(인본주의)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이때 인본주의에 묶이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즉, ‘악’이라고 표현된 부분이 인본주의(옛자아)라면 ‘시험’이라고 표현된 부분이 거듭난 자아의 방향에서 본 인본주의 시험을 말하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나라,권세,영광’이 영원히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바로 주기도문의 첫 구절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샌드위치 구조 때문입니다. 즉,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가장 중요한 ‘일용할 양식’의 의미를 감싸고 있는 구조죠. 즉, 선택된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부분입니다.
주기도문에서 특이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기도이므로 이 기도가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기도하실까? 라는 묵상이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은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를 풀어서 해석하다 보면 이것보다 훨씬 깊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오늘은 그 방향성만 이해하시고 더 깊은 해석은 평생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주기도문을 해석해 보시니 어떠세요? 기도 안에 오직 복음만 들어있죠? 우리의 ‘잘살기’는 없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여러분의 아들이 물에 빠져 죽기 일보직전일 때 여러분은 그 아이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살릴까? 이것 딱 한가지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물 속으로 들어가겠죠.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영원한 난제인 기도응답도 매우 쉽게 풀 수가 있습니다. 기도응답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늘 똑 같습니다. ‘항상 이루어 질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우리의 기도는 거의 안 이루어지거나 확률적으로 이루어 지죠. 그런데 오늘 그 대답이 보이지 않습니까?
기도는 오직 예수님이 하실만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도다’라고 선언하시면서 그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스스로 다 이루어 내셨죠. 결국 우리가 제대로 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갖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이미 다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에 대한 성경말씀을 보죠.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
이미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과거형으로 표현하셨죠. 이제 우리가 늘 모순에 빠졌던 기도응답의 미스테리가 풀렸죠?
마지막으로 아셔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보여준 기도의 모습들은 전부 '복음의 속성'을 기도로 표현하여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신 것은 복음의 속성 중 '인본주의와의 공간적 분리'를 가르치시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시는 모습은 '인본주의와의 시간적 분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두 손을 드는 것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우리의 옛 자아가 하나님께 항복'을 하는 모습입니다. 두 눈을 감는 것은 '인본주의를 보지 않겠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롯의 가족이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는 장면을 기억나시나요? 소돔과 고모라는 '인본주의(이 세상)'를 의미합니다. 소돔(인본주의)이라는 장소와 분리해야 하고 소돔(인본주의)에서 천사가 지정한 시간에 분리해야 하고 눈을 감은 것 처럼 소돔(인본주의)를 보지 말아야 하죠. 이스라엘이 애굽(인본주의)을 탈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 에피소드와 출애굽 애피소드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도하는 모습들' 도 그 기도의 자세가 목적이 아니라 인본주의(죄)와의 분리의 중요성을 기도라는 도구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기도는 교회가서 하는 것, 산에서 하는 것, 새벽에 하는 것, 눈 감고 하는 것, 두 손 들어 하는 것 ~~~ 이 필요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복음의 속성을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이 모든 모양의 공통 본질만 챙기시면 됩니다. 그 본질은 '인본주의와의 분리'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