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오늘부터 몇일 동안 할 묵상은 한가지 패턴에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부분을 복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전도하는 방법’으로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복음의 눈’이라는 안경을 착용하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복음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인 ‘제자들의 파견’ 장면은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으로 선택한 자들을 잠깐 파견한 인생을 가리키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그 모든 선택된 자들의 대표로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안경’을 끼시고 성경을 보셔야 합니다.
말씀의 시작에서 꼭 집어서 ‘이 열둘’이라고 성경은 표기하죠. 직전 묵상에서 설명드렸듯이 12란 숫자는 선택받은 자들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12지파, 12제자, 12*12*1000=144000명 : 선택된 자 모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 보면 이방땅과 사마리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시죠. 두 문장은 대치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과율과 논리로만 이해하면 항상 모순됩니다. 그래서 복음의 눈으로 살펴야합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은 전혀 다른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의 초점은 ‘전도를 아프리카 밀림까지 전해라’라는 지역적 범위를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 자격이 어떠한 인본주의의 범위와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인 ‘이방땅과 사마리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씀의 촛점은 ‘이미 선택된 자는 정해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명제의 차이가 이해가 되나요? 정의하면 첫 번째 명제는 ‘무조건적 선택’을 가리키고 두 번째 명제는 ‘제한 속제’를 가리킵니다.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것은 인간의 조건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제한속제라는 것은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는 보편적 구원은 없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하면서 갑자기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라고 합니다. 얼핏보면 연결이 자연스러워 보이죠. 그러나 조금 예민하게 살피면 이 연결은 매우 부자연스럽습니다.
‘천국이 왔다. 병든 자가 고쳐진다.’를 잘 묵상해보세요. 이 말은 ‘우리 아빠는 날 너무 사랑해 그 증거로 날 위해 삼시세끼 돈까스를 사줘’의 수준입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에 묶이면 어쩔 수 없이 이 땅이 말하는 수준에 묶여 버리죠. 죽을 때 까지~~ 그것을 바로 ‘땅 지 묶일 옥 ’이라고 합니다.
병든자, 죽은자, 나병환자,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바로 인본주의에서 분리시켜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특성을 병든자, 죽은자, 나병환자, 귀신들린 자가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본주의에서 분리해서 복음의 진영으로 이끌고 오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병든자를 치료하는 것을 ‘거저주라’로 하시죠. 이것은 교회에서 신유은사로 치료하고 혹은 복음을 전파하고 돈을 받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을 복음의 진영으로 이끌고 오시는 댓가가 사람의 방향에서 보면 ‘아무런 댓가’없이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오직 예수님이 전부 댓가를 치루신다는 뜻입니다. 너무 마음이 먹먹하지 않나요? 이 글을 쓰면서도 울컥하네요.
지금의 교회는 이런 말씀에 대한 해석을 말씀 전하고, 치료 은사를 행하고 돈 받지 말라는 ‘인격수양’이라는 인본주의 꼭대기에 묶어 놓죠. 그러나 그들의 뒤쪽으로 가보세요. 전부 다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사례비라는 명목으로 받아내죠.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그런데 이 말조차 선교갈 때 하나님이 전부 다 해 줄 테니까 우리는 아무런 준비하지 말라는 뜻으로 전파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이미 복음에서 멀리 벗어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직 복음은 인본주의에 묶여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말씀은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입니다. 이 부분의 해석이 매우 난해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먹을 것을 준비하지마라, 하나님께서 일꾼에게 자기 먹을 것을 다 줄 것이고 이것이 마땅하다’ 라는 의미로 들리시죠? 이 말을 영어성경으로 잠깐 풀어보죠.
‘ for the worker is worth his keep.’ 이것을 복음에 맞추어 풀어 보겠습니다. 해석하면 ‘왜냐하면 그 일꾼은 그가 지키려는 것이 가치가 있다.’입니다. 당연히 여기서 '그가 지키려는 것(his keep)이 바로 복음이겠죠. 이제 좀 정리가 되시죠? 정리해서 다시 이 말씀을 해석하면 ‘인본주의에 기대서, 인본주의에 묶여서 복음을 전하지 말거라. 오직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자가 가진 복음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에 집중해야한다. ’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렇게 하신 분이 있으시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