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 이라는 말로 복음의 사역을 설명하십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상징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실이 어떠한 실체를 상징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나사로의 죽었다 살아남이 실체적 목적이라면 나사로는 지금까지 살아 있어야 하죠.
모든 인간의 육체의 죽음은 이렇게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만드신 상징입니다. 그 실체는 바로 '지금 우리가 모두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고난에 빠지면 빨리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하죠. 그런데 그 말은 믿음이 좋아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우리가 현재 죽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죠.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선택된 자들을 살려내시죠.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것이 믿음이죠. 그것을 알게 되면 내가 살았다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리고 이것은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절에 보면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라고 나오죠. 죽은 우리를 살려 내시고 예수님은 그렇게 살려낸 자와 '함께' 계시는 것이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잔치할 새'라고 표현하면서 살아난 우리가 '천국잔치'에 있을 것임을 가리키죠. 이 모두 단어 하나 하나가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우리를 복음으로 살려내시고 우리와 천국에서 함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자들은 절대 '생명'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땅인 무덤에 묶여 그 무덤에 관한, 즉 이 땅에 관한, 즉 인본주의 바벨탑의 꼭대기에 관한 이야기만 하죠. 그 다음 구절에서 이 두 종류의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복음을 대하는 마리아의 태도와 그것을 인본주의의 논리로 설명하려는 가룟유다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로 설명된 죽은 우리를 살리신 댓가를 십자가에서 대신 치루어야하는 것을 그 다음절에서 '마리아의 장례절차의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하시죠.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라고 되어있는 부분이 바로 예수님의 장례, 즉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의 대표인 가룟 유다가 말하죠. '이 비싼 것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왜 아깝게 낭비하는가? 라고 하죠. 그리고 성경은 친절하게 설명을 달아 줍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에 눈뜬 자들은 이 내용의 사실 여부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절도 행위'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 촛점을 마추어서 넘어가면 안됩니다. 성경은 가룟유다가 나쁜 놈이라는 것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은 복음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그럼 이 부분에서 우리가 알아야할 내용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행하는 '구제와 봉사'가 아니라면 모든 '구제와 봉사'는 전부 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여기서는 돈으로 표현) 훔쳐가려는 절도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본주의에서는 이런 구제와 봉사 행위를 아름다운 선행으로 포장을 하여 박수를 쳐주죠. 그러나 그런 행위를 하는 자도, 그 행위를 박수 치는 자도 전부 다 절도행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의 구제와 봉사는 그 깊은 속 안을 들여다 보면 하나님이 받아야 하는 영광을 내가 가로채려는 본질이 숨어있습니다. 명예, 인기, 박수받기 등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죠. '돈 벌어서 하나님 일을 할 것이다.'라는 것이 대표적인 절도행위의 선언이죠. 더 정확한 요점은 이것이 바로 또 다른 '선악과' 따먹기 입니다.
인본주의 혹은 인본주의 종교에 갖혀 있는 자들은 절대 이 부분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과거 행했던 모든 '덕의 쌓음'이 모두 부정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자들을 박해하죠. 이것이 극대화 되면 그렇게 말하는 자를 없애버리죠.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복음이 전파되는 근본 원인을 없애버리려는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오늘의 말씀에서도 잠깐 비추어 냅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라고 하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 여기서 장례는 당연히 십자가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죠. 즉, 마리아의 행위는 우리가 간직해야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눈 뜬 자들이 해야 할 일이죠. 우리는 우리가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살아날 수 없는 '좀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딱 한가지 살 수 있는 방법이 생겼죠. 예수님의 피와 살을 매일 먹어야 하는 것이죠. 피와 살을 먹기 위해서는 매일 그 분을 죽여야 하고 그것을 먹어서 나의 피와 살로 만들어야하죠.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을 조금 좁게 해석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날이 멀지 않았으니 다른 불쌍한 자 보다는 곧 죽어서 이 땅에 없을 나의 십자가에 집중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런데 만약 이 말을 이렇게만 해석을 하게 되면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이 되어 버리죠. 그래서 이 말은 이중 비유가 숨겨져 있는 말입니다. 이렇게 좁게 해석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안에 더 깊이 숨겨져 있는 말은 "시간이라는 한계를 정해 놓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찾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인생이라는 기간 동안 복음을 놓치지 말라는 말이죠. 눈을 뜨세요. 아니 눈을 뜨게 해달라고 쉬지말고 기도하세요. 단 1초라도 이 기도를 쉬게 되면 그 쉬는 1초 동안은 틀림없이 '인본주의 시스템'에 다시 들어가서 허우적 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쉬지말고 기도하냐? 고요?
기도는 기도가 방해합니다. 무릎을 끊고, 두손을 모으고, 시간을 내고, 장소를 정하는 등의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오히려 기도를 힘들게 하고 방해하죠. 이렇게 인본주의적 종교와 누룩은 우리 교회에 무섭게 침투해 들어와 있죠. 기도에 이렇게 행위라는 누룩을 섞어 '멋진 모습의 신앙 생활'로 바꾸어 버렸죠. 그런데 실제로 이런 기도를 계속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의식에 빠져 버리죠.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참고 견뎌서 이런 기도 행위를 하고 있는 경우가 더 문제 입니다. 이것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죠. 이것이 바로 누룩입니다. 누룩은 항상 모순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주고 고민하게 만들죠. 새벽예배시간에 성도들 보다 더 무릎끊고 앉아 있어야 하는가? '김집사는 나보다 먼저 일어 났는가? '라는 고민하는 목사의 코미디까지 보게 되죠. 교회 버스 놓치면 안되는데 이쯤에서 끊어야하나? 라는 고민도 하게 하죠. 옆에서는 '랄랄라'이라는 아무말 대잔치를 하고 있고 저 앞에서는 자기 자식 서울대학교 붙여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있죠. 아무튼 코미디 전당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새벽에 시간을 내서 산에 가서 기도한 것은 무엇이냐? 이것을 따라 했는데 그것도 잘못이냐? 라고 하는 자들이 있겠죠. 일단 두 가지를 알아야합니다. 첫째 예수님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으니 예수님이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없으니 우리 속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신다'라는 말씀을 정확하게 시청각 자료로 보여 주신 것이에요. 그것을 더 정확하게 설명하시려고 제자 3명을 데리고 올라가셔서 같이 기도하자고 3번이나 말했는데 제자들은 모두 잠만 자고 있었죠. 결국 예수님이 마지막 3번째 가서는 '그래 그냥 너희들은 자라'라고 하시죠. 둘째. 이렇게 하신 이유가 바로 기도의 정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이에요. 즉, 새벽이라는 시간적 분리와 산이라는 공간적 분리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즉, 기도의 진짜 정의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인본주의와의 분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인본주의에서 분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뿐입니다. 결국 늘 복음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기도'의 진정한 정의입니다. 술 한잔 마시면서 복음에 대하여 부부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것이 가장 '기도의 모범'일 수 있습니다. 아니라고요? 예수님께서도 금식해야 할 유대인의 명절에 죄인과 창녀들과 포도주를 드시면서 대화를 했죠. 예수님이니까 그렇지? 이해한다고요? 이렇게 바꾸어 보죠. 주일날 우리교회 목사가 예배시간에 예배를 빠지고 옆 동네에 가서 창녀들을 불러서 소주 한잔 한다고 해보죠. 이해할 수 있나요? 그런데 당시 예수님 시대의 상황은 이것의 100배 이상의 심한 행동이었죠.
여러분의 기도에서 인본주의를 분리하여 기도를 하여보십시오. 아마 많은 분들이 단 한 단어도 기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부터가 진정한 시작입니다. 그 때 부터가 여러분은 눈을 뜨신 시점이자 진정으로 기도하는 시점이 되죠.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사실 시간적 정의 보다는 의미적 정의가 더 강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 자체도 숨어 있는 복음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알게 해 주겠다는 의미가 크죠. 결국 깊은 기도, 즉 진정으로 주님과 복음의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기도를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부터 진정한 기도를 하십시오. 성경에서 인생에서 역사에서 환경에서 복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찾아보세요. '오늘 비가 내리는 구나~~ 이 비는 복음으로 어떻게 하나님이 설명하시려고 만드신걸까? 비는 물이고 물은 생명으로 배웠으니까 하나님의 세상으로 상징되는 하늘에서 이 땅에 생명을 끊임 없이 내려 주시는 것을 상징하는 구나. 이것이 복음의 스토리구나~~~' 복음이 실체이고 천지창조가 상징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전부 복음의 눈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인생 조차도 이 범주에서 벗어 날 수가 없죠. 그런데 이것이 너무 힘든 일이므로 이것을 직접 설명하신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의 묵상을 통해서 눈을 뜨시고 그렇게 뜬 눈으로 세상을 복음으로 해석하시고 그 깊은 이치를 깨닫게 되면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죠. 그렇게 발견하고 주님께 항복하는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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