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완료)

눅21:34-38(24.05.16.목)

은혜바라기 2024. 5. 16. 08:31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오늘도 심판의 날에 일어날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연속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심판의 날의 진정한 정체는 지금 우리의 인생 80년 기간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세상의 마지막 날도 존재하지만 그 날은 심판을 설명하는 여러 상징 중 가장 마지막에 일어나는 상징, 즉 심판을 설명하는 마지막 표지판일 뿐입니다. 심판 날의 참 본질은 나의 인생 기간을 의미하며 그 심판의 날의 징조는 나의 인생의 기간 중 계속 나에게 보내는 경고를 의미합니다. (심판의 날에 대한 개념이 너무 중요하므로 서론이 오늘까지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 34절 '술취함, 방탕, 생활의 염려'가 나옵니다. 이에 대한 에베소서 말씀을 살펴보면,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함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의 정체는 뭘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은 술 먹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일단 대답은 술 먹는 것은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구원에는 더 더욱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행위’를 중요시하는 종교인들이 만들어 놓은 제약에 불가합니다. 

 예수님도 식사 때 마다 제자들과 죄인, 창녀, 세리들과 포도주를 드셨죠. 심지어 구약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포도주와 독주를 먹고 하나님을 즐겁게 찬양하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매우 자주 나옵니다. 계속 말씀드렸지만 이 세상은 모두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대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이 세상이라는 무대를 통해 복음을 알게 되면 예수님과 연합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므로 천국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합된 선택받은 자들 개개인이 천국의 요소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천국을 묘사하는 12가지 보석은 선택받은 자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승천하면서 천국을 예비하러 가신다는 뜻은 승천하신 후 부터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선택받은 자들을 모아서 천국을 만들어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설명하실 때 늘 형광팬으로 줄을 긋고 강조하면서 설명하는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이 인본주의는 신본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이 인본주의가 죄의 정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인간의 기준이 선이라고 불리는 인본주의 세상에 묶여 살죠. 그래서 인간은 인본주의 가치를 따라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술 취하는 것’이 인본주의 가치에 묶여 살아가는 인간들을 가장 잘 설명합니다. 돈을 벌면 더 벌고 싶고, 권력을 얻으면 더 큰 권력을 쌓고 싶고, 인기를 얻으면 더 않은 인기를 얻고 싶죠. 그렇게 끊없이 인본주의 가치를 탐하다가 결국 그 가치로 인해 추락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술을 먹으면 더 술을 먹고 싶고 그렇게 술을 계속 먹다가 처참한 모습이 되는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래서 ‘술 취하는 것’으로 우리의 인본주의 인생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즉, 아담 이후로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모든 인생을 ‘술 취한 삶’이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가 같이 나온 것입니다. 생활의 염려는 인본주의 삶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오는 염려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방탕이라는 단어도 나오는데 이 방탕을 히브리 사전에서 찾으면 ‘낭비’라고 나옵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는 복음을 알기 위해서인데, 인본주의 가치만을 쫓는 인생은 하나님 방향에서 보면, ‘낭비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4절, 이렇게 인본주의 가치만을 쫓다 보면, 결국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 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한다고 나오죠. 마음이 둔하여 진다는 것은 복음을 계속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못 알아듣게 되면 예수님의 진정한 필요성을 알지 못하게 되는데 그것을 바로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36절에 '예수님 앞에 서 있도록 기도하고 깨어있으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알아듣고 예수님만 소망하도록 기도하고 눈을 뜨라는 의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생활 속 염려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앞에 내가 서 있을 수 있도록, 예수님 품 안에 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오직 예수님만 소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깨어있어라~~' 라는 구절이 우리에게 ‘명령’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깨우신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그 명령은 그 명령이 내려지는 순간 이미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시간에 구애를 받는 인간에게는 합당한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죠. 여러분들 중에 종교에서 벗어나 복음을 듣게 되고 깨어서 예수님만을 소망하게 된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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