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오늘은 가룟 유다에 관하여 조금 깊게 묵상합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판다는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나중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것이라고 말씀하셨죠. 가룟 유다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12제자 속에 넣으셨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팔 사람을 12제자 속에 넣지 않고 바리새인이나 로마인들 중에 한 명을 예정하여 예수님을 팔아 넘기도록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이미 아시고도 굳이 가룟 유다를 12제자 안에 넣으셨습니다. 눈치채셨나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12제자는 모두 각각 다른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 12제자는 모두 선택받은 자들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도 선택받은 자들의 대표로 등장시킨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도록 팔아 넘긴 자는 ‘나’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제물로 사용될 양을 직접 도살하여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설명합니다. 구약의 제사 방식 중 잘 못 알고 있는 부분을 바로 잡아드리면, 대속죄일에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양을 제사장에게 바치면 그 양을 제사장이 죽여서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양들은 제사를 드리는 모든 자들이 직접 죽이고 해체하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런 방식으로 선택받은 자들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매일매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2제자들 속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팔아 넘기는 우리의 정체성을 가진 가룟 유다를 넣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예수님을 죽이고 피와 살로 해체하여 그 분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냄새나는 발을 예수님께 내밀어 씻어달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매일 우리 때문에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을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식의 진짜 의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셨죠. 매일 매일 묵상하라는 의미입니다. (성찬식을 일년에 2-4번씩 치루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종교인으로써의 나는 반대로 생각하죠. 예수님을 신으로 모시고 그 분께 지극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나의 발을 씻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의 발을 씻기겠다고 우깁니다. 가룟유다를 비판하면서 나의 우월성에 고무되는 존재죠.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단지 종교인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중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참 복음을 알려주죠. 그러면 그들은 매우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 동안 지극정성으로 따르던 교회 가치가 붕괴되고 기도, 헌금, 봉사와 같은 헌신적인 신앙생활의 가치가 붕괴됩니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예수님의 참 가치가 눈에 보이면서 예수님의 자리가 늘어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성경이 다르게 보이고 인생과 역사가 다르게 보이죠.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커지면서 분쟁이 생기자 사도들은 집사 직분을 만들어 교회 일을 시키자고 합니다. 그것이 ‘집사’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명분삼아 지금도 교회는 ‘집사’를 뽑아 교회일을 시키죠.
하지만 복음의 눈을 뜨고 성경을 보게 되면 상황은 매우 이상하게 전개됩니다. 이후 성경을 보면 그 때 뽑은 집사들은 교회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말씀 전하는 장면만 나옵니다. 심지어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죽죠. 즉, 사도들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집사’라는 직분이 탄생했지만 성령께서는 그 집사에게 교회 노동을 길을 걷게 하지 않으시고 복음을 전하는 길에 서게 합니다. 즉, 인간은 항상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만 성령께서는 그 어리석은 선택을 통해 복음을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주방에서 일하는 마르다와 예수님과 대화만하는 마리아 에피소드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에피소드는 마리아의 칭산이 포커스죠.
마찬가지로 기독교라는 종교도 하나님 보시기에 ‘인본주의 종교’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선택받은 자들을 찾으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면 선택받은 자들은 복음을 통해 눈을 떠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정체성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가룟 유다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스스로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에게 ‘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단 1%라도 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여 구원하는 방식을 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악함’은 하나님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야곱과 씨름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신 것이 이것을 의미하죠.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오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될 때 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정체성이 한 눈끔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절대 절망 속에서만 한 줄기 소망의 빛은 매우 밝게 보이죠.
설 명절 잘 보내십시오. 2월3일부터 다시 포스팅하겠습니다.
끝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 되어 있습니다.
**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 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참 복음을 단 한 사람이라도 같이 고민하고 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곁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런 분께 이 묵상을 전해주시고 함께 고민하세요.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들만 그 분의 음성(복음)을 듣게 됩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삶에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묵상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할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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