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는 단지 배경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한 선택받은 자들의 인생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산은 땅에서 들려 나와 하늘을 향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본주의에서 분리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고로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라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인본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소식인 복음을 선택받은 자들에게 들려주려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13절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예수님께서 원하는' 입니다.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우리의 옛 자아는 기독교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알미니안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알미니안주의란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면 우리가 손을 잡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지극정성’ 이라는 누룩으로 신앙생활을 하죠. 이 부분은 매우 세심하게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지극정성을 하지말자~~ 가 아닙니다. 종교인들은 지극정성에 방점을 찍는 다는 것이고 선택받은 자들은 오직 '예수님'에 방점을 찍을 뿐 지극정성은 단지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압니다. 이 차이는 너무 미세하지만 건널 수 없는 요단강과 같습니다.
사실 신약은 4복음서만으로도 완벽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과 나머지 서신서들이 신약에 포함된 주된 목적은 이 알미니안주의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원하는 자들만 그 분께 나아오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원하여 그 분께 나아오게 된 자들은 12명이 되죠. 이 12라는 숫자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이 땅의 숫자 4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숫자 3의 곱입니다. 즉, 이 땅에서 예수님(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4*3=12)
요한 계시록 결론격인 21-22장에 나온 천국의 모습은 모두 12문, 12보석, 12사도, 12진주 등등으로 표현되어 있죠. 또한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제자, 그리고 계시록의 인침받은 사람들 12*12*1,000=144,000명 등등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든 모임을 항상 12라는 숫자로 표현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끝난 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선택받은 자들의 고난의 인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온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방향성을 가지기 때문에 900살 언저리를 살았던 인간은 이때부터 나이가 120살로 줄게 되죠. 하지만 120년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수명이 초점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의 고난의 삶' 을 의미합니다. 즉, 너는 순례자의 삶을 살거라~~ 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12제자, 즉 모든 선택받은 자들을 찾아서 자신의 신부(지체)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라고 되어있죠. 이것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완벽하게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천국을 만든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장소가 아닌 관계의 개념입니다.
이후 12제자를 ‘보내사 전도도 하며’ 하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들을 통해 복음이 계속 전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12제자들은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가지게 된다’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그 속성이 귀신들린 것과 똑같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은 귀신이 시키는 대로만 쫓아 살게 되죠. 마찬가지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은 평생 인본주의 가치만을 쫓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의식주, 즉 제물과 돈을 쫓는 것이 첫째요. 인기, 권력, 명예 등의 가치를 쫓는 것이 둘째요. 종교 가치를 쫓는 것이 가장 최상의 인본주의 가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대신 이기신 3가지 시험이였죠.
정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훌륭한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역 교회 공동체를 쫓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지도자, 규칙, 프로그램을 쫓는 것도 아닙니다. 훌륭한 크리스찬의 삶을 쫓아서도 안 됩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것이 유일해야 합니다. 혹시 당신은 교회에서 단 2-3 사람들과 단 한 시간이라도 오직 예수님만을 주제로 대화해 보신 적이 있나요? 구역예배를 잘 생각해보아도 결국 교회공동체나 자기위로 혹은 설교의 복기 뿐 아닙니까?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정체성(이름)만을 고민하며 모인 적이 있나요?
“마태복음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경에서 ‘이름’은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12제자의 이름이 하나하나 거명되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때 시몬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하셨고 야고보오하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더하셨죠. 이미 가지고 있던 이름은 인본주의 가치를 쫓는 나의 옛 자아의 정체성을 의미하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더하여 주신 이름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나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가룟 유다는 다음 묵상에서 포스팅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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