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직전 묵상의 배경은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신 후 무리가 모여들자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고 심지어 제자들을 제촉하여 배를 타고 피하게 하셨죠. 그렇게 강을 건너가서 게네사렛 땅에 내립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설명하신 후 항상 자리를 피해 다른 곳을 가십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들을 설득할 때 까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를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 부모는 자녀를 찾기 위해 놀이터에 갔습니다. 그 곳에 놀고 있던 아이들 중에 자신의 아이를 찾지만 내 아이가 없다면 빨리 다른 곳으로 내 아이를 찾으러 가야 합니다. 그런데 놀이터에 있는 다른 아이를 붙잡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아이가 내 아이로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속성입니다. (물론 이 때와 시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다시 강은 건너 게네사렛 지방에서 복음을 설명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병치료 기적이라는 도구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고 있죠. 예수님은 사건 속에 숨겨 복음을 전하거나 비유에 숨겨 복음을 전하거나 기적 안에 복음을 숨겨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에 대하여 ‘복음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들려준다~~ 유기된 자들에게는 숨긴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3: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움직이지 못해 침상에 누워있는 병자를 통째로 옮겨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져다 두거나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어 병이 낫기를 원하는 자들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함께 살 때 가장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인간 본위의 삶인 인본주의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살인, 간음, 절도, 거짓말 같은 것은 죄가 아니라 죄의 증상이죠.
이렇게 인간이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상태를 침상에 묶여 있는 병자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침상에 묶여 있는 병자는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나옵니다. 이 ‘누군가’가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땅에서 선택받은 자들을 계속 예수님께 견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방법은 ‘신비’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 모릅니다. 성경은 이것을 ‘바람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가는지 모르다’라고 표현하였죠.
“요한복음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이 선택받은 자들을 견인하는 방법(how)은 ‘신비’에 묶여 있지만 무엇(what)을 가르치는지는 정확하게 나옵니다.
“요한복음16:7-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께서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는 의미는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죄의 정의가 분명하게 나와 있죠? 원래 죄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렇게 묶여 있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상태는 오직 인본주의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이 구절이 어렵습니다. 10절은 ‘의’에 대한 복음적 설명입니다. 의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11절 심판에 관한 것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이 세상 임금은 나의 옛 자아를 의미합니다. 더불어 인본주의와 사탄도 같은 범주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우리는 모두 사탄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와 사탄에 귀속되어 있던 나의 옛 자아가 언제 심판받았나요? 바로 십자가에서 받았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스스로에게 그 죄 값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적 정의가 실현된 것입니다.(10절) 그리고 이렇게 정의가 실현되면서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11절) 그래서 이제는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9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병치료가 여기 저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죄인인 우리를 여기 저기 다니면서 모두 복음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