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완료)

요8:41-51(21.05.06.목)

은혜바라기 2021. 5. 6. 09:08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비가 '마귀'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인정하셔야합니다. 하나님이 사탄을 허락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탄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께 선택을 받게 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씀에 나오죠. 그리고 그 거듭난 자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하죠.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가 실체일까요? 아니면 지금 말씀드린 새 창조가 실체일까요? 새 창조가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진짜 목적이죠. 천지창조는 전부 이 새 창조를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이 스토리를 '복음'이라고 하죠. 눈을 뜬 자만 볼 수있는 이 세상의 진면목이죠. 이 세상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무대일 뿐입니다. 

 

 이 스토리의 일부 중 하나가 사탄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의 스토리 없이 창조물을 영적으로 높은 위치에 가져다 놓게 되면 벌어질 수 있는 일의 증거가 바로 사탄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사탄보다 더 높은 영적인 위치로 창조가 되었죠. 사탄보다 더 교만해질 수 밖에 없는 위치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면 어떨까? 즉, 나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면 어떨까?  나의 기준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입니다. 선악과죠. 재미 있게도 사탄은 '나를 영적으로 객관화 할 때의 나의 모습'입니다. 사탄은 이 숨가쁜 하나님의 복음 스토리를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등장하는 하나의 소품이죠. (즉, 이 세상에서 '타인'이 나의 거울이라면 영적 세상에서 '사탄'이 나의 거울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때 유대인의 고백이 '그렇습니다. 나는 마귀입니다.'라는 고백을 했다면 그는 복음에 눈을 뜬 자였겠죠. 그러나 눈을 뜨지 못한 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하죠. 교회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대부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는 '죄인 코스프레'일 뿐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외치는 목사가 있다고 해보죠. 그런 자들에게 '이 쓰레기 목사야!!!' 라고 한번 해보세요. 당장에 얼굴이 벌게 지면서 나를 싫어할 것입니다. 웃기죠? 아이러니하죠? 죄인이라고 하면 '아멘'하는데 그 보다 한참 약한 표현인 '쓰레기'는 절대 안되죠. 전부 죄인 코스프레 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쉽지만 어렵지요? 쉽게 예를 들어보죠. 우리는 주일 마다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리죠. 대부분 자신의 정성을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성을 헌금, 봉사, 기도, 전도, 찬양등의 형식을 통해서 드리죠. 그런데 복음을 알게 되면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절대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요. 오직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 받으십니다. 이게 완벽하게 이해가 되는 자가 눈을 뜬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오직 예배를 통해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오직 천국은 예수님 한 분만 가실 수 있죠.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온전한 예배란 이 고백을 하러 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을 선택하셔서 그것을 알게 하시면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죠.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죠. 이것을 거듭난다고 하죠.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었다고 하죠. 정확하게는 어떤 시점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계획한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배를 통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오직 예수님이 반대로 나를 위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에피소드가 있죠.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어떻게 주님이 우리의 발을 닦아 주십니까? (제가 주님의 발을 닦겠습니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자가 된다.'라고 하셨죠. 지금의 인본주의 교회에서 학생 수련회에 갈 때 마다 세족식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교사가 학생의 발을 닦아 주면서 '이렇게 남을 섬기라'는 행위를 가르치죠. 이것은 완벽하게 전혀 다른 기독교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 몇십년 신앙생활을 한 자들이 그 메카니즘에서 벗어나 눈을 뜨는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가 아니면 불가능하죠. 그래서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기독교가 되는 이유는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에 답이 있습니다. 듣지 못해서죠. 보지 못해서 입니다. 장님이자 귀머거리입니다. 예수님이 왜 복음을 설명하시면서 틈틈히 장님과 귀머거리를 고쳐서 보고 듣게 만드시는 지 아시겠죠? 예수님의 사역을 시청각 자료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바로 지금 눈을 떠서 성경을 복음으로 읽고 있는 우리에게. . .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라고 하시며 우리는 절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성경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보고 회개하여 천국을 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은 선택받은 자를 위한 책입니다. 그들을 찾는 책입니다. 이 글은 지금 눈을 뜬 우리에게 말하는 책입니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이라고 하셔야합니다. 그리고 애통하십시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바라십시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눈을 뜬 자가 됩니다. 참 어렵습니다. 복음을 알아가는 것은 거울을 보며 오른손 잡이가 왼손으로 쪽집개를 잡고 자신의 흰머리를 뽑는 것처럼 헤깔립니다. 아가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의 상징인 솔로몬과 교회의 상징인 술람미여인의 사랑의 대화가 나오는데, 그 시점이 매우 난해합니다. 1인칭, 2인칭, 3인칭, 나? 너? 전지적 시점? 도대체 알 수가 없죠.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복음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하나로, 예수님과 교회를 하나로 보며 기술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 난해한 시점 조차도 하나님이 복음을 설명하는 방법인 셈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렇게 복음의 길이 어려운 이유가 또 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완벽하게 예수님의 지체로 분리가 되면 좋겠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내 안에 옛자아와 같이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본주의에 완벽하게 기준을 두고 있는 나의 옛자아와 주님께서 믿음으로 분리하신 새로운 피조물인 내가 동시에 공존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하실까? 우리가 증인의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증인의 삶을 살아라!' 라는 것을 '밖에 나가서 전도해라.' 혹은 '일주일 동안 살면서 예수님 처럼 착하게 살아라' 라고 가르치죠. 잘못된 길입니다. 증인의 삶이란 새로운 피조물로 눈을 뜬 내가 옛자아와 같이 살면서 내가 얼마나 무익한 죄인인지를 알아서 예수님의 필요성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삶을 말합니다. 즉,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나의 죄됨의 증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쓸모 없는 죄인이자 괴수인 나의 옛자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옛날의 선악과의 개념과 같고, 구약의 율법의 개념과도 같고, 미래의 지옥의 개념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천국에 가게 되면 아마도 지옥이 바로 옆에 있을 것입니다. 그 곳에는 분리된 인본주의가 놓여 있겠죠. 그것을 보며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나도 저렇게 분리되어 영원한 고통속에 있었겠지. 라는 것을 회초리로 삼겠죠. 하나님께서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위해 지옥을 만드셨다고 생각했나요?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직 선택받은 천국에 거한 자들의 회초리로 만드신 것입니다. 즉, 에덴 동산의 '선악과'와 같은 역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사탄도, 이 세상도, 먼 훗날의 지옥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도 모두 다 '선택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것일 뿐입니다. 

 

 바울도 이 증인의 삶을 잘 살았죠. 그가 가장 말년에 쓴 로마서의 끝자락에 보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고백을 하죠. 이것은 그냥 '죄인처럼 겸손해져라' 라는 말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자신의 옛자아을 보고 '나는 안되는 구나'라는 것을 완벽하게 고백한 증인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몇년을 살지 모르지만 그 동안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를 절대 안되는구나'를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사십시오.  애통하십시오. 그것이 답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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