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라는 말도 그냥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길'은 복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길을 설명하시고 있다는 뜻이죠.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라고 말씀에서 맹인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보지못한 자입니다.
제자들은 이 자가 못보는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시죠. 이 자를 통하여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밤'과 '낮'이 나오죠. 성경에서 밤은 빛이 없는 세상, 즉 예수님이 안계신 인본주의를 나타냅니다. 반대로 낮이란 빛이 있는 세상, 즉 예수님이 계신 복음을 설명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가 성경과 인생을 통해서 복음을 보지 못하는 것을 '밤'이라고 합니다. 눈을 뜨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기도 하죠. 말씀에서 '밤이 오리니 그 때에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죠. 복음의 주체인 예수님께서 계시지 아니하면 절대 그 누구도 복음을 전달할 수도, 복음을 알아들을 수도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때 '밤이 오리니'라는 말의 시기적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 후 부터 성령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로 말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의미적 시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현대 교회에서도 예수님께서 계시지 아니한 곳은 복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봉사, 헌금, 기도, 찬양, 전도가 충만해 보여도 주님의 방향에서 선택하지 않은 곳이면 그곳은 그냥 인본주의 종교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인본주의적 종교일 때, 즉 가장 인간우선주의적 종교일때 , 즉 인간을 위로하고 인간의 박수를 많이 받는 교회일 수록 양적 부흥은 잘됩니다. 당연하겠죠. 인간은 인간이 좋아하는 곳을 찾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말입니다.
반대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도 하십니다. 이것도 시기적으로는 지금 예수님이 계시는 상황을 말하시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도 더 정확하게는 '의미적 시간'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즉, 성령께서 오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선택한 자들의 시간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계속 인생을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복음을 설명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선택받은 자들에게 고통과 고난을 통하여 '고민'하게 만드시고 그것을 통해 인생의 무가치함을 보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게 하시죠. 이렇게 복음을 아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가족의 소중함도 버려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가족간에 화평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고 자식이 부모를, 형제가 형제를 박해한다고 하셨죠.
복음에 있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복음의 길을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관계가 긴밀한 관계라면 복음을 좀 더 깊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는 있죠. 그러나 본질 상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차이는 극복이 안됩니다. 길을 보는 자는 어떻게 하든 끌고 가려고 하지만 길을 보지 못하는 자는 자꾸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 아퍼하죠. 이것은 이해와 극복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눈을 뜨게 해주세요'라는 기도와 그것에 대한 주님의 응답 뿐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라고 하시죠. 하나님께서 흙으로 무엇을 하신적이 있으시죠? 사람을 창조하셨죠. 그 모습을 재현하고 계신 것이죠. 즉, 새로운 창조에 대한 설명입니다. 즉,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것, 즉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와 같은 의미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이라) 라고 하죠. 원래 눈을 뜬 자는 예수님을 알아 보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의 등에 업히게 됩니다. 예수님과 동행을 하게 되죠. 예수님 곁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자는 눈을 뜨고 그들의 이웃과 바리새인, 유대인들에게 가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는 뜻으로 '실로암(보냄)'의 뜻을 차용해서 복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자는 전에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라고 하죠. 눈을 못 떠서 구걸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은 인본주의에 갇혀서 인본주의만을 소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인본주의에서 소망하는 것들은 돈, 인간관계, 인기, 건강, 명예 등이죠. 예수님은 이것을 소망하는 모습이 바로 눈 못뜬 소경이 구걸하는 장면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걸하지 말아라'고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아픕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는 인본주의자들은 복음을 말하는 사람에게 화가 나죠. 심지어 박해하고 죽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죠. 그런데 이것이 산상수훈의 8복 중 가장 마지막 복입니다. '박해를 받는 복' 재미있죠?
9절을 보면 이웃사람들이 이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비슷하다고도 하는 별 중요하지 않은 듯한 구절이 있죠? 그러나 성경은 단 한 획도 중요하지 않은 말이 없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복음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모두 소경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라고 묻죠. 그러자 그는 어떻게 눈이 떠졌는지 사실대로 말합니다. 이후 그들이 '그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니 '알지 못하노라'라고 하죠. 즉, 이 소경이었던 자는 아직도 영적 소경이라는 말입니다. 이 부분은 이중 함수가 들어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잘 이해해보세요. 이 소경은 진짜 영적 눈을 떴을까요? 아닙니다. 당시 베드로 조차 결국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그 분을 저주하며 도망쳤죠. 이 사람도 영적 눈을 뜬 것이 아닙니다. 즉, 본질 상 아직도 영적 소경입니다. 그런데 육체적인 소경의 눈은 떴죠. 이자가 눈을 뜬 이유는 이 자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이 글을 읽고 있는 선택받은 자들이 목적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모두 소경이고 성경께서 오셔서 눈을 뜨게 하셔야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경은 본질 상 아직도 영적 소경입니다. 그것을 지금 '내 눈을 뜨게 한 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드러낸 것입니다.
에피소드가 조금 길어서 여기서 끊고 후편은 내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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