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요약)

욥기(요약) 묵상

은혜바라기 2021. 5. 21. 10:02

[ 들어가기에 앞서 '눈 높이 마추기 :  성경은 오직 복음의 스토리만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인간 즉, 나(인류)를 기준하여 해석하는 것을 인본주의(죄의 본질)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죄는 실체적 죄가 아닌 죄의 증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증상을 통하여 죄의 실체를 알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요. 감기를 통해 폐병을 알아 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전적타락한 죄인 것을 알게 되어 야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게 되면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

 욥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그래서 1절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이죠. 사람은 절대 온전할 수 없고 전부 악에 묶여 있습니다. 실제로 욥도 악한 자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표현은 '이제부터 욥을 예수님의 상징으로 쓰겠다.'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욥에게 속해 있는 재산과 자식들은 '예수님의 소유'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소유란 천국을 가리키는데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이므로 예수님이 소유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나, 우리, 교회)과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즉, '교회'를 의미하죠. 

 1장 5절에서 보면 욥이 그 자식들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중에 다루겠지만 욥은 죄인인 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욥이 상징하는 바는 '죄인인 나를 담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내가 하나라는 한몸원리를 벗어나서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욥기는 하나님께 사탄이 나와서 욥을 고발하면서 시작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욥을 복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죠.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욥의 가축들과 종들과 자녀들이 모두 죽죠. 즉, 욥에게 속한 것들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로 인해서 예수님으로 부터 떨어져 나와서 영적으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욥은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모습으로 표현되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어렵죠? 한몸원리 해석의 어려운 점입니다. 

 이 후 사탄의 두 번째 고발로 욥은 자신의 신체에도 고난을 당하죠.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지위를 버리고 이 땅에 죄인의 육체로 오셔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 때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하죠. 이 여자는 '나와 교회' 입니다. 우리의 수준이죠. 그러나 욥은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온전히 감내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후 욥의 세 친구가 등장합니다. 이 부분이 2장부터 32장까지 엄청 길게 나옵니다. 세 친구의 3은 하늘의 숫자입니다. 즉, 예수님의 하늘의 친구입니다. 그래서 이 세 친구는 율법(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3장부터 31장까지 계속 율법적으로 옳은 말만 하죠. 이 세 친구는 그 역할을 정확히 수행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이 세 친구를  ‘옳다. 틀렸다’ 로 몰로 가면 안됩니다. 이 세 친구는 이 세상에 던져진 '율법'입니다. 이 세상에 던져진 '선악과'라고 할 수도 있죠. 

 

 욥은 '죄인인 나를 품고 있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라고 했었죠. 그래서 이 욥의 세 친구가 등장하여 욥과 대치하고 있는 부분은 율법 속에 살아가는 나를 가리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알아보죠. 

 3장부터 31장까지 욥이 내 뱉는 말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때 욥은 바로 우리입니다. 정확하게는 예수님의 품속에 있는 우리입니다. 부연 설명드리면, 예수님이 우리를 품고 있고 그 품 속에 있는 죄인들이 끄집어내는 '아픔의 말들'입니다. 이 말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까지 나오죠. 그리고 살아가는 것이 저주스럽다는 말도 많이 나오죠. 심지어 하나님께 ‘나를 왜 태어나게 했냐?’며 따지는 말도 많이 나옵니다. 이런 말들이 계속 연결되죠. 그러면서 ‘내가 뭘 그리 잘못했냐?’ 며 따지는 말도 많이 나옵니다. 그때마다 세 친구가 율법을 들고 나오죠. 그리고 율법으로 정확히 지적을 해줍니다. 이 대화가 끝도 없이 이루어집니다. 이 3-31장에서 나오는 몇가지 욥의 대화를 열거해 보죠.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이 3장부터 31장까지의 대화의 의미를 살펴보죠. 욥이 말한 한줄 한줄은 전부 우리가 인생에서 했음직할 만한 독백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역활로 등장하는  세 친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명령합니다. 거기에 대한 욥의 대응은 원망, 불평, 저주, 인정, 비난, 포기, 대립 등등의 표현으로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대로 살아야 할 욥은 지옥에 쳐박혀도 모자랄 정도로 막 나가죠.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욥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욥의 정체성은 죄악된 우리를 품고 계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욥을 '의로운 자'라고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의로운 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죠. 욥기는 매우 고차원적 개념의 복음의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의 정체성은 바로 하나님께 원망하는 간음한 신부를 품고 있는 신랑입니다. 그가 그의 신부의 죄까지 다 품고 두 다리로 서서 그 율법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이 이해가 가셔야하는데......  어렵죠? 

 다시 정리해보죠. 욥은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불평많은 죄인인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이렇게 간음한 신부인 우리를 전부 다 품으신 것이 3장부터 31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리석은 신부의 불만은 계속 율법이라는 예수님의 세 친구와 대립을 하죠. 그래서 더 괴롭죠. 도저히 해결이 안됩니다. 그 때 32장에 갑자기 전혀 다른 자가 등장합니다. ‘엘리후’입니다. 

 "욥 : 32장 1절-5절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아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

 엘리후는 성령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의 긍휼 속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 율법으로는 도저히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죠.  즉, 인간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여기고 내 기준이 맞다고 여기고 인본주의가 옳다는 여기며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욥은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게 되므로 성령으로 상징되는 엘리후는 그에게 화를 내고, 율법을 담당한 세 친구는 그 율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으로 엘리후는 그 세 친구에게도 화를 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세 친구가 아닌 엘리후가 욥을 담당하죠. 나이가 적다는 표현은 성령께서 가장 나중에 등장하신다는 의미적 순서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상징인 엘리후는 32장부터 37장까지 계속 욥을 가르칩니다. 이 부분이 바로 복음을 깨닫게 하는 장면입니다.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 바로 성경에 쓰여진 성령의 의무입니다.

 이렇게 엘리후의 가르침이 끝나자 드디어 욥은 복음을 알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 38장 부터 드디어 욥이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죠. 이 부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나타나셔서 이야기하시는 장면으로 표현이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과 욥의 무능력함의 비교입니다. 이것이 38장에서 41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이 후 욥기의 마지막 42장을 보죠. 1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재미있죠? 특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고백을 하죠. 즉, 복음에 눈을 뜬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욥은 진정한 회개가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울고 짜면서 하는 회개는 회개라기 보다는 반성입니다. 어느 종교에나 다 있는, 그냥 학교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일 뿐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이 ‘티끌’ 즉,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될 때 나올 수 있죠. 반성은 반대입니다. 내가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식을 깔고 하는 행위죠. 심지어 술, 담배 끊는 것을 믿음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죠. 도대체 하나님의 품격을 어디까지 떨어뜨려야 할까요? 

 

 중요한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이 죄 많은 신부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품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의롭다'고 이미 하나님으로 부터 선언되어진 천국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고발(복음의 계획 중 일부)로 인해서 '인생'이라는 것을 살면서 끊임없이 세친구(율법)과 대립을 하면서 '나는 죄인이구나'를 깨닫게 되죠. 그래서 복음을 알아듣게 되면서 '오직 예수님 밖에 없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보게 된다.'라고 할 수 있고, '천국을 가게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예수님의 품에 있는 나를 보게 된다.'라고도 할 수 있고 '드디어 평강을 얻었다'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욥이 처음 가진 소유의 갑절을 받는 것입니다. 즉, 인생과 천국 두 개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첫 천국에서 버려진 신부가 더 좋은 천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한번의 인생만 살게 되죠. 더 정확하게는 그 인생이라는 땅에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어서도 묶입니다. 인본주의에 묶여서 그 땅에 갖히게 됩니다. 땅 지, 갖힐 옥 지옥이죠. 그러나 선택된 자들은 인생이 단지 복음을 알게 하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죠. 즉, 진정한 갑절의 인생인 천국에 거할 것임을 알죠. 정확하게는 이미 예수님의 품에서 천국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재미있게 설명드려보죠.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이렇게 하나님께 저주까지 퍼 붓고 있는데 내가 왜 살아있지? 라며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데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죠. 내가 예수님의 품속에서 그 분의 보호를 받고 있고 그 분이 나를 대신해서 내 죄를 덮고 그 분이 심판을 다 받으시면서 두 다리로 버티고 서 계시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입니다. 즉, 욥기는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이라는 것을 욥이라는 사람에게 투영하여 복음을 설명한 책입니다. 

 그래서 욥기의 마지막인 42장의 후반부에 나오는 말들은 전부 천국과 복음을 상징하는 의미입니다. 갑절의 복(인생+천국), 아들 일곱(7=천국의 숫자), 딸 셋(3=하늘의 숫자=성부성자성령), 백사십 년을 삶( 7+7 갑절의 천국)을 뜻하죠. 즉, 이 모든 에피소드는 전부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죠. 

 욥기는 복음의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욥의 시험을 위해 창조된 무대와 같은 것이라는 것, 즉, 천지 장조는 죄인인 우리를 품고 계신 예수님의 스토리가 상영되는 극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허락하신 분이 성부 하나님이셨죠. 즉, 모든 복음의 계획을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사탄도 나쁜 역할로 등장하죠. 사탄은 복음을 돋보이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한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오직 우리를 품고 끝까지 성령님께 인도하신 예수님이 역사의 주인공이죠. 우리의 죄를 다 품으시고 3-31장까지 견디신 것입니다. 그 분께서 죄인을 품고 성령께 인도하기 위해 두 번의 고난을 당하시죠. 즉, 주변의 모든 것(천국의 지위)이 전부 버려짐을 당하신 것과 본인 스스로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죠. 그러나 끝내 죄만 꺼내 놓는 우리를 성령님께 인도해 눈을 뜨게 만드시고 결국은 하나님까지 보게 만드십니다. 

 

 인본주의 종교를 벗어나지 못한 많은 교회는 이 욥기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을 하죠. 즉, 욥처럼 고난을 받지만 결국 잘 이겨내면 갑절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사람 중심, 인생 중심의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은 아마도 이런 설교가 자꾸 모순된다는 것을 느끼면서 뭔가 갑갑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작은 속삭임에 귀를 여셔야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교회입니다. 더 역설적인 것은 부패된 교회는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가장 치명적인 걸림돌은 세상 사람들로 부터 매우 칭찬받는 교회입니다. 부패된 교회는 '이게 아닌데'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죠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치명적인 인본주의를 성경에서는 누룩이라고 합니다. 99%의 성경말씀에 1%의 누룩을 섞어서 맛있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하죠. 99%의 하나님의 열심에 1%의 인간을 섞죠. 40%의 하나님에 60%의 인간을 섞으면 금방 발각되죠. 이정도 섞여 있던 것이 중세 카톨릭 교회였죠. 그래서 금방 알아차리고 종교개혁이 된 것입니다.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지금의 인본주의 교회들입니다. 휼륭한 인격을 가진 목사와 많은 봉사로 무장되고 몇천명 몇 만명이 모이는 교회를 주의해야합니다. 

 

 결론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내가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인되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으로 남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끊임없이 불만과 저주를 쏟아내겠지만 그것은 바울이 '나의 옛사람'이 쏟아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과 분리(거룩)하십시오. 오직 나를 담고 계신 '예수님'만 소망으로 바라보세요. 정말 깨어 있어야합니다. '이번 주 기도하면 로또 당첨 될꺼야'와 같은 가르침에서는 벗어나기 쉬워도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와 같은 누룩이 섞일 수 있는 가르침에서 벗어날 방법은 우리의 힘으로는 없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면' 이것이 보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나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 주님의 복음을 듣게 해주세요. 올바른 길인 예수님의 품에서만 있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만 하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