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십일조

십일조 묵상

은혜바라기 2021. 7. 20. 09:58

십일조에 관하여...

 십일조는 ‘10개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10개 중에 하나를 대표로 하나님께 드려 나머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이런 십일조의 행위 자체가 실체가 아닌 상징입니다. 십일조의 진정한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대표입니다. 그 분은 스스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서 나머지 모든 죄인들의 구원을 이루셨죠. 이것이 바로 십일조의 실체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려고 죄인들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제물(돈)로 설명하신 것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시작한 십일조는 끊임없이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필요하다~’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가 예수님을 계속 설명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강한 율법으로 묶어서 계속 지켜내게 하셨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십일조의 본질적 의미를 훼손했죠. 지도자들이 십일조를 엉터리로 감독해서 자신들의 배만 불렸고 그것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엉터리 십일조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런 엉터리 십일조 시스템에서는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는 메카니즘’이 점점 사라지기 때문에 말라기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의 교회가 '십일조를 잘 내라 혹은 십일조를 정확히 내라'는 인본주의 종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말라기3장에서 말하는 십일조를 읽어보죠.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을 가지고 ‘십일조를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재물을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줄 것이다’라고 설교하는 자들의 입을 하나님께서 막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라기1장13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십일조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훔친 것, 병든 것으로 헌금을 내면 그 헌금을 통하여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예수님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즉, 본질적 의미가 훼손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복음(예수님)을 설명하는 수단인데 그 수단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일조의 실체인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실체가 오면 상징은 조용히 물러가야 합니다. 상징이 계속 드러나면 실체가 오해를 받고 가려지게 되죠.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아직도 상징물 뿐인 십일조에 의미를 두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은 훔친 것, 병든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돈과 그 돈을 드리는 마음은 모두 다 병든 것, 훔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십일조인 예수님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그 예수님을 온전히 설명하기 위해서 십일조의 온전함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죄인된 인간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죠. 그래서 인간은 늘 온전하지 못한 십일조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하신 십일조가 되신 예수님이 오신 것이죠. 이제는 십일조의 진정한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만 온전히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율법에 묶여서 '부담과 자기 의'가 더해지는 순간 순간 그 십일조가 바로 훔친 것, 저는 것, 병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 받으십니다. '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 헌금을 드리는 순간 우리의 정성을 하나님께 드리는 착각을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인본주의 종교의 공통적인 특징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돈을 절대 받지 않고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품격을 인간의 수준까지 떨어뜨려 인간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참 기독교는 이렇게 품격이 낮지 않습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신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어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설명할 수단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사, 율법, 선지자 등등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모든 구약의 사건들 조차 전부 예수님을 가리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십일조도 그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의 본질을 생각하십시오. 온전한 십일조는 오직 예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만 받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헌금과 봉사로 하나님께 우리의 재능과 노력을 부여해서 드린다는 것은 온전한 십일조가 아닌 저는 것, 병든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예수님만 온전한 십일조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는 천일번제, 감사헌금, 선교헌금, 장학헌금, 생일헌금 등등 수 많은 병든 것, 저는 것을 파생시켰죠. 천일동안 하나님께 내가 가진 돈을 쪼개서 드리면 정성이 극대화되므로 하나님께서 더 감동하셔서 나를 더 잘살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죠. 그 안에 예수님이 도대체 어디 있죠?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파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오직 예수님으로만 연결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회에서 십일조로 예수님의 다리를 대신하고 봉사로 예수님의 팔을 대신하면서 하나님과 온전하게 연결하고 있던 예수님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죠. 목사들은 이런 십일조와 봉사를 강조 하면서 교회의 부흥을 외치죠. 하지만 절대 절대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 받으십니다.

 

 온전한 예배란 오직 하나님께 예수님만 드리는 것입니다. 즉, 내가 부인되고 오직 하나님의 계획인 복음의 계획만 읍쪼리며, 묵상하며, 그 주인공인 예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발을 닦으시고 자신의 살을 먹이시고 자신의 피를 먹이셨음을 알게 된 것을 고백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의 계획에 고개를 끄떡 끄떡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것을 표현한다고 두 손을 들어 열광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 조차 안받으십니다. 오직 예수님만 받으십니다. 우리는 티끌(nothing)입니다.

 그러면 헌금도 봉사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답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단 1도 점수로 매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조기 축구를 한 후 회원들끼리 돈을 모아서 점심 한끼 같이 먹자고 돈을 걷는 것과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것은 가치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합니다. 둘 다 가치적으로 '0'일 뿐입니다. 오직 가치는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모든 가치가 '똥'이라고 선언한 것 처럼 우리의 눈이 크게 떠져서 나의 가치가 완벽하게 0%로 수렴이 될 수록 예수님의 가치가 100%으로 확장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십일조인 예수님으로 예배를 드리는 삶이 되죠. 예배는 일요일 11시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의 시간이 전부 예배입니다. 

 능력이 되면 십일조, 십이조, 십삼조도 하십시오. 봉사도 많이 하십시오. 그래서 목사들의 월급도 채워 주시고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 나눔도 베푸세요. 그러나 그것에 묶여서는 안됩니다. 해 보셔서 알겠지만 우리는 교회에서 헌금과 봉사를 열심히 할 수록, 박수를 더 많이 받을 수록, 스스로 만족할 수록 뿌듯한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세상의 기부와 봉사를 통해서 뿌듯한 마음을 갖고 보람을 느끼죠. 이 두 마음은 완벽하게 같은 것입니다.  한 쪽의 가치는 100이고 다른 쪽은 0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 복음적 가치는 0입니다. 그것을 알고 하시라는 것입니다. (( 좀 더 깊은 묵상을 하게 되면 이 두 가지 상황은 모두 성령의 섭리와 신비 속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

 십일조와 봉사가 복음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딱 한가지 뿐입니다. 십일조와 봉사를 하면서 '내가 십일조와 봉사를 할 수 없는 존재이구나~~'를 느끼는 순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 주일날 1만원씩 헌금을 했던 습관이 있었는데 어느날 잊어버리고 봉투 준비를 못해서 그냥 지갑에 있는 현금을 꺼내서 헌금을 하려고 지갑을 열었더니 10만원짜리 수표 한장과 천원짜리 지폐 한장 뿐일 때 10만원을 할까? 천원을 할까? 망설여지는 마음이 간파당하면서 그 동안 해 오던 그 잘난 헌금행위의 무가치함을 발견하면서 '아~~ 나는 역시 안되는구나.  이러니까 하나님은 예수님만 받으시겠구나'를 느낀다면 그때의 헌금행위는 확실하게 복음을 설명하게 되죠. 역설적이죠?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보죠. 교사로 봉사를 합니다. 어떤 한 아이를 유치부에서 부터 헌신함으로 가르치고 봉사했는데 그 녀석이 중학교에 가면서 삐뚤어져서 그 동안 나의 정성과 노력을 무시하고 교회에서 욕을 하면서 교사인 나를 무시했다고 해보죠. 그 때 마음에 들어오는 감정은 '배신감과 절망'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절망이란 나의 열심에서 오는 '희망'이 무너졌을 때 찾아 오는 것이죠. 그러나 그 절망을 느끼면서 오히려 '소망'을 알게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그래서 예수님의 열심만이 필요하구다.'라는 소망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런 식의 전개가 펼쳐질 때 봉사는 복음적으로 사용됩니다.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에피소드를 하나 더 살펴보죠. 자기 소유의 땅을 팔아 하나님께 모두 바쳐야 하는데 일부는 감추고 나머지만 하나님께 드리다가 죽임을 당한 부부의 이야기 입니다.  대부분의 해석이 하나님의 의도와 완전히 반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에피소드는 모든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헌금 행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드리는 모든 십일조가 정확하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위라는 것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헌금생활을 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을 통해 복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전의 반전이죠. 어렵습니다.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100만원 중에 10만원을 구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서 '나는 하나님께 다 드린 것이다.' 혹은 '나는 말씀대로 다 한 것이야' 라고 믿게 되죠. 그것이 정확하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똑같이 거짓속에 포장한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나머지 90만원을 가지고 우리의 욕심을 이루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은 다 이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이 과정에서 결국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아니면 안되는구나~~' 라는 복음의 눈을 뜨게 됩니다. 반대로 유기된 자들인 종교인들은 더 열심히 십일조를 붙들죠.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 가치도 능력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받으십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소유가 되는 것으로 복음 공동체가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천국이 되는 것이죠.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와 헌금이라는 것이 없었죠. 연보라는 개념만 존재했습니다. 십일조는 이후 한참 지나서 다시 타락하기 시작한 교회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연보'의 뜻은 '돕기 위해 나눈다'라는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돈을 드린다는 개념 자체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