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절기는 본질적으로 안식일과 같은 개념이기 때문에 몇 일 전 묵상했던 안식일에 대하여 먼저 간단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안식의 뜻은 ‘하나님의 복음이 너무나 완벽하여 사람이 할 것은 없다. 오직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홀로 이루신다 '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일요일을 주일성수로 지켜야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품 안에 들어 있어야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 천국도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입니다.)
마찬가지로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의 실체도 예수님입니다. 이런 상징적 절기들이 가리켰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이 상징적 절기들은 조용히 물러가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이것을 끝끝내 맥추감사절이라는 절기로 만들어 지키고 있죠.
[[유월절]]
유월절은 넘을 유, 넘을 월, 즉 ‘넘어가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죄를 넘어감' 이라는 속성을 설명하는 절기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옷을 다 벗고 누워서 자던 사건이 있죠. 이때 아들 함은 그것을 보고 발설을 했고 아들 셈은 그것을 보고 옷으로 덮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장면으로 복음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노아가 술 취하여 옷 벗고 뻗은 것 부터 잘못 한 것이 아니냐? '라는 논지로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키면 안됩니다.
노아의 에피소드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 ‘죄를 덮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노력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는 것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린 양은 고스란히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이 어린 양이 예수님이시며, 어린 양의 피는 십자가죠.
지성소에 있는 법궤 안에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두 돌판,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맛나 3가지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이 3가지 물건을 법궤 안에 넣고 뚜껑을 닫습니다. 그리고 그 뚜껑 위에 제물의 피를 뿌리는 제사를 지내죠. 이것도 인간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덮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제 1 속성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덮은 것입니다. 절대 우리가 착한 크리스찬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는 척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그것을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이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하는데 무교절은 누룩을 넣지 않는 빵을 먹는 날이죠. 순수한 복음은 너무나 맛이 없습니다. 교회가 재미없고 사람이 잘 안 모이죠. 그런데 설교에 약간의 누룩을 섞으면 논리와 인과율이 넘치는 재미있는 설교가 됩니다. 심지어 설교에 게그도 섞어 넣죠.
교회도 마찬가지로 프로그램, 사회봉사, 각종 행사 등등의 누룩을 조금만 섞으면 교회가 활력이 넘쳐 흘러 사람이 많이 모입니다. 무교절은 이런 누룩을 강하게 경고하는 것이죠. 누룩 섞인 말씀을 가지고서는 절대 복음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무교절입니다.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는 이유는? 복음은 고날픈 인생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유월절에 ‘신을 신고’라는 표현은? 복음은 인본주의와의 분리를 1초라도 ‘미룰 수가 없을 정도’로 긴박한 것임을 설명합니다.
유월절에 ‘허리띠를 두르고’라는 표현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라는 옷을 입히시고 그 옷이 벗겨지지 않도로 허리띠를 두르고 우리를 견인하신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유월절에 ‘지팡이를 지고’라는 표현은?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 오순절 ]]
두 번째 절기인 오순절은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7일째 되는 안식일이 일곱번 지난 다음날이므로 안식의 안식을 뜻합니다. 안식일을 강조한 날이므로 온전한 안식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정체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오순절은 완전한 예수님을 설명하는 날입니다.
구약의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은 날이고, 신약의 오순절은 사도행전 오순절 성령 강림의 날입니다. 이 두 사건은 복음적으로 같은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구약에서는 시내산에서 말씀이 내려와 예수님을 설명하는 날이고, 신약에서는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예수님을 설명하는 날이죠.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고 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송아지 우상을 섬기며 다시 죄에 빠져 있었죠. 이때 모세가 가지고 내려온 두 돌판은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서입니다. 그래서 돌판이 두 개인 것입니다. (한 쪽에 5계명, 다른 쪽에 5계명을 쓴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이라는 말 자체도 오해가 많습니다. 십계명은 10개의 말씀이기 때문에 10계명이 아닙니다. 10이라는 숫자는 ‘완벽함’을 가리키는 숫자이기 때문에 ‘말씀은 완벽하다’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10개로 추려서 성경에 잠깐 등장한 것 뿐입니다. 진짜 율법은 613개로 주셨죠. 그것이 나중에 세부규칙까지 더해지면서 2134개로 늘어납니다. 이후 나중에는 알 수 없는 장로의 유전까지 합쳐지면서 셀 수 없이 많아지죠. 심지어 이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만들어지고 지켜지는 법의 뿌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법은 다 율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즉, 빨간 신호등에 서 있어야 하는 것도 그 뿌리를 쫓다 보면 결국 하나님의 율법에 맞닿게 됩니다. 이 세상은 성령께서 신비로 견인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 올 때 유대인들은 전부 우상을 섬기고 있었죠. 그런데 이 상태에서 두 돌판(계약서)이 내려오면 유대인들은 전부 다 죽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서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천국, 못 지키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죠? 여기서 감동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두 돌 판이 내려오다가 깨져 버렸죠. 이 깨진 돌 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십자가에서 깨져 버린 예수님입니다. 심판이 내려오면 우리는 다 죽게 되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스스로 십자가에서 깨진 것이죠. 복음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이렇게 전부 예수님의 이야기 뿐 입니다.
오순절을 다른 말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절은 추수를 기념하는 것이지만 그 본질적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신부(지체)를 찾아서 모으시는 것(추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맥추절을 ‘누룩’ 삼아 이용합니다. 예수님이 실체로 오신 이후 맥추절의 실체는 예수님이 우리는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대상에 쌀 푸대 올려 놓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불쌍한 영혼들을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기독교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맥추절이 가리키는 실체인 예수님만 생각하는 것. 이것이 교회가 유일하게 할 일 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품에 안아 주셨는지를 매일 매일 묵상하는 것이 맥추절인 것입니다.
[[장막절]]
장막절은 초막절,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단어에서 대충 감이 오시죠? 장막절은 광야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장막을 짓고 생활하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고 추수한 것을 장막에 거둬드리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고로 이 장막절의 본질은 성전되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우리가 성전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영원히 보호받으며 함께 거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이 세상의 삶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면 이 세상은 조금씩 무가치한 세상, 무의미한 세상, 고난의 세상으로 다가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린 양의 피(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이후 '행복한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광야'의 삶을 살게 되었죠. 무려 40년 동안 42곳의 처소를 옮겨가며 1세대가 다 죽습니다. 반대로 유기된 자들은 애굽에 남아 풍족한 포로의 삶을 삽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여유있는 노년을 애굽에서 보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완벽한 크리스천의 삶이 뭘까요? 그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우리는 원래 예수님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게 살지 못하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로 오셔서 나 대신 그런 삶을 살고 나 대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품 속으로 들어가서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품을 장막, 성막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구약의 장막, 초막, 성막,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적 장막절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 날이 되면 집 앞에 텐트를 치고 일주일을 지냅니다. 똑같은 의미로 우리도 교회 건축에 애를 쓰고 건축 헌금을 작정하고 교회건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까지 드리죠.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실체이신 예수님을 떠난 영적 간음입니다. ( 이 글 조차 '행위' 위주로 보는 자들은 "그럼 교회를 건축하면 다 간음한 것이냐?"라고 묻게 됩니다. 눈을 감은 자들에게 빨간색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
짧게 나마 3대 절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공통점이 있죠? 전부 안식일과 동일하게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 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묵상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을 정말 못합니다. 그래서 날짜를 정하고 주일을 정하고 절기를 정하고 프로그램을 정해서 내가 무엇인가 '행위'를 하여야 평안을 얻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이것을 계획하고 받아주고 서로 서로 잘했다고 칭찬하고 위로합니다. 그래서 외적 부흥이 일어나면 '나는 잘하고 있어'에 묶여 버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의 방향성을 가지고 입니다. '나는 무가치한 죄인'이라는 것을 계속 깨달아서 오직 '예수님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 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모든 것은 다 절도요 강도'라고 했을까요? 예수님을 제외한 그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참 복음은 우리의 편안함을 깨뜨립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복음은 커피한잔의 소소한 행복에 취해 사는 삶을 깨뜨리고, 식구들이 옹이종기 모여있는 화목한 분위기와 평안을 깨뜨리죠. 복음은 계속 나의 인생을 부인하고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께 시선을 돌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 편안'이 깨져야 '복음의 평강'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욕심이 채워지거나 두려움이 해소될 때 평안과 행복을 느낍니다. 이 세상이 주는 행복이죠. 실제로 인본주의 최상의 목표는 '행복'입니다. 인간의 삶은 전부 다 이것을 차지하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욕심과 두려움’의 근원인 인본주의에서 우리를 분리시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것을 평강이라고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