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완료)

창3:17-20(22.12.29.목)

은혜바라기 2022. 12. 29. 08:40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오늘은 죄를 지은 사람 중 아담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을 묵상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인해서 이 땅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이 자연스럽게 순응하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 땅의 천지만물은 저주의 색이 입혀졌습니다. 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영원한 생명력이 존재하던 천지만물은 이 때부터 변했겠죠.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묶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시 이것을 복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땅이 저주를 받았다.’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천지만물은 ‘선하게 창조가 되었죠’ 그리고 이 ‘선’의 정체는 우리가 아는 ‘선’하고 차이가 크죠. ‘참 선’의 정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금이 간 것입니다. '인간이 혹은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가 선이 된 세상이 되었죠.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을 저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은 결국 ‘소멸’의 길을 걷게 되는 저주를 받게 되죠. 그런데 이 모든 것 자체가 전부 새로운 창조, 즉 교회의 구원을 설명하는 도구라는 방향성을 잃지마세요. 

 ‘아덴’ 과 ‘죄 짓기 전의 온전한 아담’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8명의 아이들이 달리기를 합니다. 그 중 한 아이가 저의 아들이라고 해보죠. 그런데 그 아들에게 다 떨어진 슬리퍼를 주고 달리기를 하라고 합니다. 당연히 그 아들은 꼴등을 합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넌 꼴등을 했구나~~’ 그러면 저의 아들은 뭐라고 할까요? 당연히 ‘아빠가 나한테 다 떨어진 슬리퍼를 주고 1등을 하라는 거야?~~’ 라고 하면서 대들겠죠. 혹시 ‘아덴’ 과 ‘죄 짓기 전의 온전한 아담’의 메시지를 눈치 채셨나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가장 최고의 환경인 에덴과 죄를 모르고 오직 선만 알고 있는 아담 그리고 심지어 모든 짐승들의 이름, 즉 그 모든 짐승들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까지 주셨죠. 아마 그 당시 아담의 능력은 예수님의 능력과 같았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하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 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인간은 그 믿음을 잃어버렸죠. 오직 믿음은 예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을 짓기 전의 아담은 이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고로 아담의 능력은 예수님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권한과 함께 그 의무를 쉽고 순조롭게 행할 수 있는 어마 어마한 능력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인간은 최고의 환경과 최고의 선 의지 그리고 최고의 능력을 완벽하게 받은 상태로 창조가 된 것이죠. 그런데도 인간은 결국 죄를 저지르게 되죠. 그런데 심지어 저주 받은 환경과 영적으로 죽은 우리가 죄를 안 짓고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게 바로 ‘에덴’이라는 최고의 환경과 ‘완전하고 온전한 아담’이라는 조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을 막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역사상 혹은 주변의 가장 휼륭한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그 분을 생각하면서 ‘그 분은 절대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막으신 것입니다.  천국의 땅이라고 불리는 최고의 환경인  ‘아덴’과 예수님의 마음과 능력을 가진 ‘아담’도 결국 죄를 저질렀다니까요~~

 갓 태어난 아기? 여러분~  만약 하나님께서 갓 태어난 아기의 힘을 성인의 힘으로 태어나게 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 때도 '천사같은 우리 아기'라는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나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민 낯입니다. 


 이런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시죠. 그러면서 ' 땅이 가시덤블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합니다. 해석이 어렵지 않겠죠. 우리는 인생을 매우 매우 힘들게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광야같은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축복’입니다. 이 땅의 삶이 항상 행복하다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2 아들이 가출을 했는데 가출을 해서 멋진 친구, 멋진 집, 멋진 미래가 계속 펼쳐진다면 그 아들은 가출(부모와 분리)이라는  선택을 절대 후회(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고민하기 때문에 그 죽음 너머의 세상을 고민하게 되고 그 고민으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필요성을 고민하게 되기 때문에 이 죽음이야말로 참다운 축복이 되죠. 그런데 말씀을 잘 보면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표현하실 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흙은 ‘아무것도 아님’을 나타내죠. 즉,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으니 그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끝이 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옛 자아에 대한 결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옛 자아와의 완벽한 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이 왜 분리가 될 수 밖에 없는가 하면, 그 다음 20절 말씀에서 아담이 여자를 ‘하와’라고 부르고 이 뜻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결국 다 죽고 없어질 것이라고 하다가 이제는 여자가 산 자의 어머니가 되어 산자들이 나올 것이라고 연결합니다. 이상하죠? 그런데 복음으로 보면 완벽한 구조로 설명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종합해볼께요.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과 분리가 되었죠. 그래서 원래 흙이었던 인간은 결국 다시 흙이 됩니다. 즉, ‘아무것도 아님’이 되었죠. 원래는 다 그냥 흙으로 버려질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 즉 복음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음의 필요성을 알 수 있는 환경(잉태, 출산, 노력, 수고, 죽음)을 주셨죠. 그래서 사람은 이런 환경 속에서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구원의 필요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죠.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분의 지체들을 찾아서 원래는 흙이었던 그 지체들을 그 흙(땅)과 분리를 시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산 자가 되죠. 

 그래서 오직 예수님과 그 분의 지체들만 구원을 받게 되고 나머지 모든 유기된 자들, 즉  ‘아무것도 아님’은 흙으로 분리되어 결국 ‘아무것도 아님’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도 성경은 복음 이야기만 하시죠. 

 

 (( '흙'에 대한 것만 짧게 더 말씀드릴께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땅(흙)을 만드신 방법은 '물'에서 '땅'을 분리하신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모순입니다. 물에는 흙이라는 요소가 없습니다. 즉 '없음'을 굳이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한한 인간에게 '없음'으로는 그 무엇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없음'인데 이것을 '약간이라도 있는 것 처럼 보이게 한 설명 도구' 인 '흙'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성경의 흙을 파자하면 '티끌'이라는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그리고 이 티끌의 본질은 다시 '없음'입니다. 인간이 80년 정도를 살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 시체도 시간이 지나면서 티끌이 되죠. 완전히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눈으로 계속 확인시켜주시죠. 그 이유는 바로, "너희들의 몸 뿐 아니라 너희의 업적, 공로, 자손 등등 그 어떤 것도 다 이같이 '아무것도 아님'이란다."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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