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완료)

창3:21-24(22.12.30.금)

은혜바라기 2022. 12. 30. 07:46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21절의 ‘가죽옷’이 정확하게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나오는 ‘예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임금이 혼인잔치를 했는데 청함 받은 자들이 오지 않아서 그들을 다 심판하고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고 하죠.이후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다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로 다시 내던져집니다. 복음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이 보이시죠? 바로 ‘예복’입니다. 그 예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불러’라는 사전 배경이 깔려 있죠. 구원은 우리의 가치, 우리의 행위, 우리의 능력이 단 1도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복’을 입었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첫번째로 청함 받은 자들의 정체는 '율법'으로 청한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선한 자나 악한 자나’라는 배경이 깔려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예복을 ‘선한 일’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의 착각조차 허용하지 않으려시는 하나님의 세심함에 놀라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세히 복음을 설명하고 계시는데도 인간은 신기하게도 이 구절을 ‘신앙생활 열심히 하기’로 받아들인다니까요. 

 ‘가죽옷’은 희생이 필연적이죠. 즉, 예수님의 희생(십자가)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22절,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라는 구절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전에 말씀드린대로 성경은 ‘신인동형론’적인 형태로 쓰여진 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상황을 인간의 상황처럼 표현하신 것을 말합니다. 절대 인간이 선악을 안다고 하나님과 같이 될 수가 없죠. 그러나 이 구절에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복음은 취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선악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도 그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의 정체가 뭐라고 했죠?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선의 정체성이라고 했었죠. 그런데 이렇게 선이 선으로 존재하려면 필연적으로 그 ‘기준’이 하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준이  인간 스스로에게 생겨 버렸기 때문에 ‘이상한 상황’이 생겨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볼께요. A라는 사람이 창으로 방패를 찌르면 방패를 뚫어버리는 것이 보기에 좋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하죠. 그에 반면 B라는 사람은 창으로 방패를 찌를 때 방패가 창을 막는 것이 보기에 좋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세요. 이후 창과 방패를 부딪칠 때 과연 ‘선(좋음)’이 되려면 어떤 과정과 결과가 나와야 할까요? 이것이 그 유명한 창 모, 방패 순  '모순' 의 탄생 배경이죠. 그래서 이제 기준이 둘로 갈라진 하나님과 인간은 늘 모순이 됩니다. 그런데 진짜 참 선은 오직 하나님께만 존재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기준은 전부 ‘악’한 것이 됩니다. 이 인간의 기준을 ‘인본주의’라고 하죠. 

 22절 보면, 조금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 중 하나’ 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부러 표현하신 이유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각각 다 독립적으로 위치해 계신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이 세분의 ‘기준’은 똑같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후 하나님의 걱정이 나옵니다.( 신인동형론적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걱정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죠. )  그 하나님의 걱정은 바로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생명나무열매를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입니다. 

 하나님과 반대의 기준, 즉 ‘악’에 묶인 사람이 만약 그 기준을 회복하기 못하고 그 ‘악’에 묶인 채 생명나무열매를 먹고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을 뭐라고 할까요? 영원한 지옥입니다. 즉,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걱정이었습니다. 너무 웃긴 것은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나쁜 짓을 한 인간이 또 생명나무열매까지 따 먹는 나쁜 짓을 할까 조바심이 나셨나부다~~’ 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 뭐라 할 말이~~ 없네요.

 하나님의 걱정,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걱정이 보이시나요? ‘악’에 빠져 이미 무저갱 속으로 들어가서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이 그것도 모자라 영원히 죽지 않는 열매까지 먹고 그 무저갱 속에서 영원한 지옥의 삶을 살아갈 것을 걱정하신 것이죠. 

 그래서 23절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 동산에서 그를 쫓아낸 후에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고 되어있습니다. 일단 ‘생명나무’와 사람을 분리시키시죠. 이것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해하시죠? 이후 사람의 근본인 ‘땅’을 갈게 합니다. 즉, ‘아무것도 아님’을 갈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내가 가진 이 기준이 잘못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땅을 갈게 하는 것’이란 바로 ‘인생’ 혹은 ‘인류역사’를 말합니다. 우리가 80년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바로 ‘땅을 가는 것’입니다. 돈을 100억을 벌면 행복할 것, 즉, ‘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라는 것은 꼭 복음의 눈을 뜬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 혹은 타종교인들도 얼마든지 알고 느끼죠. 그래서 100억을 벌고 나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텅 빈' 마음을 얻게 되죠. 이후 또 다른 탑을 쌓기 위해 계획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쌓을 탑을 찾지 못하는 동안은 '우울함'에 빠지죠. 

 그들은 예수님께서 찾아 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 ‘복음’에 도달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갈등과 고민을 하지만 또다른 ‘아무것도 아닌 길’을 찾아 떠나죠. 그리고 ‘또 다른 아무 것도 아닌 길’에 몰두하면서 ‘난 내 길을 찾았다’라고 위안을 삼습니다. 

 마태복음19장 부자청년의 비유를 아시죠? 항상 착한 일만 하면서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니 그 청년은 ‘근심하며 가니라’로 끝맺음합니다. 즉, 예수님과 분리된 존재가 되죠. 심판입니다. 이 청년을 돋보기로 낱낱이 살피게 되면, 이 청년은 착한 일만 하고 온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은 아닙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은 단 1개의 율법도 지켜내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다 지켜냈다고 착각을 하면서 산 것 뿐이죠. 그래서 그에게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재물’을 내어놓으라고 하자 결국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재물을 잘 나누어주라~~욕심을 버려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이 비유의 포인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은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가진 이 ‘기준’이 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우리의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 즉, 하나님의 기준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기준에 정확하게 부합된 존재가 이 땅에 오셨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기준이 이 땅에 현현하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죠. 

 이후 24절은, 하나님께서 영생할 수 있는 열매 나무를 사람과 분리시키는 것도 모자라 천사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그것을 지키게 하죠. 이 장면이 이제 어떤 뉘앙스가 있는 장면인지 이해가시죠? 드라마로 예를 들어 볼까요? 

 자기 아들이 조폭의 일원으로 들어가서 악한 짓만 골라서 합니다. 그러나 그 부모는 그 아들이 돌이켜서 다시 가족의 품으로 오기를 기다리죠. 그런데 그 조폭의 두목이 그 아들에게 ‘너의 집에 가서 집문서를 가지고 오면 내가 너를 후계자로 삼아 영원히 이 조폭 그룹을 너에게 맡기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폭두목이 아들에게 말하는 이 내용을 그 부모가 들었습니다. 그 부모는 그 ‘집문서’를 어떻게 할까요? 천사를 시켜 두루도는 불 칼로 지키겠죠? 집이 아까워서? 아니겠죠? 아들을 영영 잃어 버릴까 걱정이 되서겠죠. 이제 이 장면의 뉘앙스가 이해가 가시나요?

  " 내년에 뵙겠습니다. 1년동안 묵상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새해에도 복(복음) 많이 알게 되세요. "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마다 묵상하세요.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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