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아담과 하와만 존재했던 역사에 드디어 가인과 아벨이 등장했습니다. 방향성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모두 ‘나’입니다. 정확하게는 가인은 나의 옛 자아를 가리키고 ‘아벨’은 거듭난 나를 가리킵니다. 이 둘은 내 안에 함께 존재하죠. 그래서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가 같은 배에서 나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서 오히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이유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눈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같은 배에서 나오게 하셨을까?’까지 고민하게 됩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이치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심어 놓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이치와 질서에서 약간이라도 벗어난 현상에 대하여 '왜 그럴까?'라며 궁금해하죠. 그러나 복음에 눈을 뜨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이치와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보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모든 '타인'은 결국 조상의 조상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시점에서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입니다. 고로 타인은 결국 '형제'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는 같은 배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국 '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죄를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와 닮은 형제, 즉 타인을 보게 하시므로 결국 나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형제인 가인과 아벨입니다. 그래서 가인도 '나'이며, 아벨도 '나'죠. 선택받은 자들은 거듭난 자아와 옛 자아가 동시에 살아가죠. 이 두 자아를 두 형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가인인가? 아벨인가? 궁금하시죠? 그들은 ‘짐승’입니다. 그냥 ‘죽은 자’입니다. 물론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오직 ‘가인만 들어 있는 자’로 해석을 해도 됩니다. 그러나 다시 방향성을 잘 잡으세요. 성경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책입니다. 오직 그들만 보고 알아듣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기된 자’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분은 ‘염소’를 ‘양’으로 고치고 바꿔서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양’은 양으로 ‘염소’는 염소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에서 ‘찾은 양’으로 ‘찾아짐’ 된 것뿐입니다.
2절 보면, 아벨은 ‘양을 치는 자’ 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죠. 사람은 이때 고기를 먹지 못했습니다. 고기는 노아의 방주 이후부터 하나님이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죠. 이때 사람은 오직 ‘씨 있는 채소와 열매’를 먹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왜 아벨은 양을 치고 있을까요? 이 양은 ‘옷’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옷’의 첫 등장이 언제였죠? 바로 하나님께서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입히셨죠. 그리고 이 ‘가죽옷’은 ‘희생’을 의미하고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복음이라고 했었죠. 즉, 아벨은 ‘복음’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하나님의 가죽옷을 복음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
히브리서에 나오죠.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에 대해서 묵상을 시작하면 너무 길게 나오기 때문에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믿음으로’라는 말을 그냥 ‘복음을 이해하고’라고 해석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가인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즉 가인은 자신이 최선을 다한 행위의 결과물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여기에 묶여 있습니다. 그들은 '그래~~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지극정성의 노력이 들어가야지~~ ’라고 생각하죠. 이것은 기독교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기하게도 이 부분이 다 똑같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 즉 인본주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인간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대접 받으면 좋다~~`라는 기준을 하나님이라는 신에게 적용하여 그 '신'도 나의 지극정성의 결과물을 받으면 좋아할 것이라는 시스템(종교)을 만든 것뿐입니다. (타 종교는 그 종교가 모시는 신에게... 결국은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신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제사 혹은 종교’에 대한 방향성을 잘 잡고 가야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창세기를 1장부터 천천히 읽어 보세요. 절대 하나님은 제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제사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성(罪性)이 제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혀서 복음을 설명했더니 인간은 '반복적으로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가죽옷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복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인간은 그 행위를 반복하고 포장해서 하나님께 자주 드리면 더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미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이 죄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허락하셔서 그 안에 복음을 담아 가르친 것이죠. 종교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복음을 알게 되면 ‘종교’를 벗어나게 됩니다.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릴께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제사’를 허락하신 가장 큰 이유는 어이없게도 ‘제사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아무리 너희들이 그 제사를 엄격하게, 신중하게, 지극정성으로 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단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게 되어 ‘난~~ 망했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 그래서 오직 예수님 뿐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이 방향성이 잡히셔야 합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 제사가 너무 너무 훌륭했다~~’라는 것이 포커스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은 바로 아벨의 제사로는 복음을 설명할 수가 있고 가인의 제사로는 복음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뿐입니다.
구약에 보면 ‘소제’라는 중요한 제사가 있습니다. 이 소제는 곡식을 가지고 제사로 드리는 것이죠. 이 소제는 하나님께서 정해서 허락하신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때는 곡식을 좋아하셨고, 가인의 때에는 곡식을 싫어하셨을까요? 말이 안 되죠. 제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가?'가 포커스입니다. 가인의 제물은 ‘인간의 지극정성’만이 담겨 있다는 뜻이고 ‘소제’에는 ‘복음의 설명'을 담아 내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포커스는 ‘복음’이에요.
그래서 5절에 보면 가인은 이런 표현을 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나쁜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돈 1,000원 달랑 드린 후 '하나님께서 이 돈 안 받는다~~’라고 하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할까요? 아니겠죠. 내 집을 팔고 월급을 다 모아서 지극정석으로 하나님께 드렸더니 ‘난 이런 돈 안 받는다~~~’라고 해야 안색이 변하겠죠?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려는지 이해하십니까? 우리의 지극정성은 하나님의 세상에서는 그냥 '똥'입니다. 눈을 뜬다는 것을 이 '똥'을 '똥'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세상에서 오직 가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만 받으십니다. 이렇게 복음은 너무 너무 쉬운데 신기하게도 절대 '나의 기준'에 가려서 그것을 보지 못하죠.
마지막으로 7절 보면, 하나님께서 ‘네가 선을 해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제 엎으려 있느니라’ 라고 하시죠. 선의 개념을 계속 말씀드렸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창조한 그 모든 사물의 본질에 ‘복음의 설명’이 잘 담겼기 때문입니다. 고로 ‘선’이란 바로 ‘복음이 잘 나타남’입니다. 그래서 가인에게 한 이 말씀은 바로 ‘네 제사는 복음을 설명하지 못하는구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설명하지 못함’을 ‘죄’이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시죠. 이것을 다른 각도로 풀면, 천지만물은 모두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탄생된 것인데 인본주의는 이 천지만물로 오직 인간세상에 유익하도록 풀어내기 때문에 ‘인본주의’ 자체가 ‘악’이라는 것입니다.
이후 7절 마지막 보면,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되어있죠.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 안에서 나의 위치입니다. 인본주의는 끊임없이 나를 자신의 그물에 넣기를 바라죠. 인본주의 사회구조는 끊임없이 나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인본주의 사회구조를 만들고 다스리는 것 또한 '나'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 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아벨은 나를 가리키고 가인은 최집사를 가리키는군~~ 이 아닙니다. 지금 가인과 아벨은 내 속에 있는 거듭난 나와 옛 자아이며 그 관계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나는 예수님의 지체이기 때문에 결국 아벨은 예수님의 표지판이고 가인은 내 안의 뱀의 표지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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