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오늘도 계속 요한에 관련한 말씀이 이어지죠. 우리가 요한의 정체성을 잘못 이해하면 성경을 엉뚱한 ‘위인전’으로 읽게 됩니다. 계속 말씀드린 대로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그것을 명심하세요. 손가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목표점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7절,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온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 선지자죠. 구약은 온전히 예수님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을 하는 도구죠. 그래서 엘리야가 도구가 되었던 것과 같이 요한의 도구 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모와 자식'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육체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매달려 있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심지어 인본주의 가치 중에 가장 최고의 가치가 바로 부모와 자식이죠. 즉, '효도와 자식사랑'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점점 더 깊게 알게 되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끊어서 잘 못 이해하면, ‘분리주의 이단’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모두 복음에 눈을 뜬 자들이라면 금상첨화인데 그중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자가 있다면 그들은 이 말을 오해하여 더 복음과 멀어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벗어난다’라는 말은 그 관계를 끊어버리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육체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만 묶여 있으면 안되고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나(교회)의 관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자면, ‘시야’를 이 땅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잠시 분리시켜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결국 영적인 삶에 들어가면 부모는 하나님 한 분, 그리고 신랑은 예수님 한 분만 모시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 관련되 예수님의 작은 에피소드를 볼까요?
“막3:31-35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버렸나요? 아니죠. 그 분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루어질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 회복을 말합니다.
17절 중반,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거스르는 자’란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죄’의 정의와도 같죠. 그렇다면 ‘의’의 정의는 뭘까요? 의란 ‘하나님과 관계가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의인의 슬기(지혜)’에 돌아오게 한다고 되어 있죠. 즉, 죄인들을 예수님의 지혜로 돌아오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지혜는 뭘까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관점으로는 십자가는 실패요. 무능이지만 복음의 관점으로는 완벽한 지혜죠. 왜 십자가 복음이 지혜인가? 를 설명하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요한이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성령께서 준비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죠. 이때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모두 도구들의 대표로 '요한'을 잠시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을 요한이라고 할 수도 있고 소금을 요한이라고 할 수도 있고 무지개를 요한이라고 할 수도 있죠. 또한 복음을 알고 있는 여러분도 요한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크게 확장하면 '천지창조' 그 자체가 요한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를 위하여' 복음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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