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완료)

눅12:11-12(24.01.17.수)

은혜바라기 2024. 1. 17. 08:3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말씀도 종교와 교훈이라는 ‘행위’로 받아서 해석을 하면, 사람들이 많이 있는 자리에 끌려가서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할 때 떨리고 창피한 마음이 들어서 준비를 단단히 하려고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성령께서 할 말을 내 머릿속에 넣어주셔서 말을 잘할 수 있게 하신다는 방향성으로 해석을 하게 되죠. 우리가 항상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이유는 복음도 모르고 예수님의 정체성도 모르고 오직 인본주의 논리와 인과율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신 후에 그 양을 깨우셔야 드디어 그 양은 자기의 목자된 예수님의 목소리(복음)를 듣게 되는 것이죠. 

 오늘 말씀의 초점은, 선택받은 자들은 박해를 받는 시점 조차 복음을 알아 가게 되는 과정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말을 잘해서 이 상황을 모면하는가? 어떻게 그들을 설득시키는가?라는 염려에서 벗어나 성령께서 이 상황 자체를 통해 선택받은 자들이 복음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도록 견인하여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는 이렇게 돼서 이렇다~~’ 라고 대답을 할 때 그 대답은 그 자들의 질문과 전혀 다른 엉뚱한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해를 할 수가 없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말씀의 초점은 ‘그들의 질문에 참다운 대답을 잘할 수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붙잡힌 후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 그들의 질문을 듣고 하신 대답들을 보면 대부분의 대답이 매우 엉뚱하죠.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을 ‘엉뚱하다’라고 여기신다면 아직 인본주의 논리와 인과율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도구로 이용하셔서 계속 복음을 설명하고 계신 것이죠. 

 즉, 복음의 세계관에 눈을 뜨신 분들은 '다른 사람과의 충돌'이 생기는 경우 그것을 그 사람과 나의 충돌이라는 기준으로 보지 않고 그 충돌을 도구 삼아 예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나에게 어떤 복음을 가르치시는가? 즉, 예수님과 나의 관계, 즉 예수님의 기준으로 이 충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을 갈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저주를 합니다. 이 때 다윗 곁에 있는 용사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그를 놔두라고 하고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 라며 시므이를 보지않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생각하였죠. 이후 다윗은 아들(압살롬)도 아버지(다윗)를 죽이려 하는 인간의 전적타락함, 하나님의 감찰하심, 하나님의 도우심 등등을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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