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완료)

눅12:8-10(24.01.16.화)

은혜바라기 2024. 1. 16. 08:31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오늘도 말씀 그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을 뜬 자와 눈을 뜨지 못한 자, 즉 구원을 받은 자와 유기된 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깊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유기된 자들은 오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대중들 앞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주저하지 않고 창피함 없이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들은 늘 자기의 ‘행위’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을 하게 되죠.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대중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주저하게 되고 창피한 마음이 드는 것이 정상입니다. 만약 이런 마음이 들지 않는 자는 사이코패스일 수 있습니다. 혹은 무대에 서는 배우와 같이 훈련과 연습으로 그런 마음을 조금 없앨 수는 있겠죠. 

 오늘의 말씀은 그런 ‘행위’를 초점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내가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은 복음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그런 복음은 그 출발이 인본주의로부터 분리하면서 출발하죠. 아브라함의 출발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면서 시작하고 모세의 출발이 '애굽'을 떠나면서 출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 중 ‘사람 앞에서’라는 의미는 ‘인본주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고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인본주의 문화 속에서 살면서 그 인본주의 문화에 묶여 버리지 않고 인본주의에 대항(분리)하여 복음의 논리를 정확히 인지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복음의 논리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지하여 그 분만을 소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종교'와 헤깔려하면 안 됩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인본주의 산물입니다. 심지어 인본주의 바벨탑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죠. 그런 종교를 만들고 그 종교의 종교인이 돼서 그 종교의 '신'으로 예수님을 올려놓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으라~~'라고 하는 것은 얼핏 보면, 오늘 말씀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본질인 복음을 인지하는 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방향성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어렵죠? 그런데 여기에 복음의 본질이 숨어 있습니다. 같은 행위를 하는데 한쪽은 인본주의 종교가 되고 한쪽은 복음의 방향성에 있다는 것은 결국 '행위'가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신 분들은 눈을 뜨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기준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복음의 논리를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것,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알게 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유일한 방법은 성령께서 나에게 찾아오시고 내 눈을 만지셔서 나의 죽은 눈을 뜨게 하시는 것 뿐이죠. 그래서 이것에 반대하는 자는 절대 복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성령 모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경 구절이죠.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의’란 예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마지막으로 심판은 이 둘의 관계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책망’한다고 나오죠. 원래 ‘설교’라는 단어를 파자하면 ‘책망’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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