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오늘의 말씀도 결국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도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읽다보면,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아라~~’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초점은 ‘염려’라는 단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습니다. 그리고 몸을 위해서 무엇을 입죠. 즉, 목숨과 먹는 것, 그리고 몸과 입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목숨과 몸은 영적 실체를 의미하고 먹는 것과 입는 것은 그것을 위한 상징(도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창조와 멸망은 한 세트로 만들어졌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멸망할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죠.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분이 멸망할 세상을 창조하셨다?? 모순되죠. 고로 이 세상은 그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시적인 시간과 공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까요?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죠. 그리고 그 복음의 대상은 교회입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진짜 창조하시려는 참 창조는 아직 진행중입니다. 창세기 1장에 만드신 창조는 참 창조를 설명하는 창조이며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 또한 참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섭리된 도구적인 세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진행 중인 참 창조는 무엇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도 하죠.
즉, 예수님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모든 구원받은 자들, 교회 혹은 성도 라고 하죠. 혹은 예수님의 지체, 신부라고 하기도 합니다. (종교적 교회, 종교적 성도와는 구별된 개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참 실체, 즉 영적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그것을 목숨과 먹을 것, 그리고 몸과 입을 것으로 나누어서 쉽게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먹을 것은 목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매일 그 먹을 것만 염려하고, 입을 것은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매일 그 입을 것만 염려하는 우리를 책망하여,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본주의 삶을 염려하지 말고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님만 소망하고 묵상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죠.
그런데 유기된 자들은 오직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생각하죠. 이런 것들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생각을 ‘염려’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통해 영적 실체인 복음만을 생각해야 하는데 오직 이 세상의 현상에만 몰두하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는 ‘염려’의 범위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질서는 통일성 있게 모두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목적에 부합하도록 섭리되었으므로 절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까마귀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죠. 그러면서 까마귀 보다 훨씬 귀한 선택받은 자들의 삶은 얼마나 더 복음에 적합하도록 섭리하셨겠는가? 그런데 너희의 고민은 키가 더 자랄까? 안 자랄까?를 염려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꼬집고 있는 것이죠.
솔로몬은 재물과 권력에 있어서 최상위 위치에 오른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결과물도 백합화의 꽃 하나만큼 보다도 ‘복음 설명’이라는 목적에 덜 부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들의 삶은 그 얼마나 복음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섭리되고 설계되었는지 진정 모르겠느냐?라고 책망하시는 것이죠.
끝
'누가복음(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눅12:32-34(24.01.24.수) (2) | 2024.01.24 |
---|---|
눅12:29-31(24.01.23.화) (2) | 2024.01.23 |
눅12:16-21(24.01.19.금) (2) | 2024.01.19 |
눅12:13-15(24.01.18.목) (1) | 2024.01.18 |
눅12:11-12(24.01.17.수) (1) | 2024.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