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안식일의 정체성은 ‘예수님’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일요일’이라는 날짜, 구약에서는 ‘토요일’이라는 날짜를 잘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안식일이라는 상징이 가리키는 ‘예수님’의 품 속에서 들어 있는 자들은 그 자리를 잘 지키라는 뜻입니다.
구약은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후 완성될 성경을 위해서 무식하다고 할 만큼 안식일의 규례를 강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죠. 그래야 안식일의 형태나마 보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것을 왜곡없이 성경에 기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후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모두 소개하면 안식일이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왜곡없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천년전 바리새인은 그 안식일의 형태를 완벽하게 지키려다가 오히려 그 실체이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형국이 되었죠. 그런데 굳이 이런 에피소드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경종을 쳐서 알리는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지역 교회에서 그 제도에 맞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앙생활은 사실 ‘종교’일 뿐입니다. 이런 종교생활을 하다보면 실체이신 예수님 보다는 그 자신의 신앙행위가 우선하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냥 ‘내가 모시는 신’ 정도의 종교 부품으로 전락을 하죠.
이런 장면을 오늘 에피소드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아’ 라고 하시죠. 즉, ‘형태’만 의존하는 자들아~~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에 동물은 먹이면서 사람은 구원하지 않는 모순을 지적합니다.
우리의 모든 종교생활은 그 본질을 들여 다 보면 이렇게 ‘모순’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날 절대 예배를 빠지지 말라~~ 를 잘 지키려고 주일예배를 빠지지 않으려고 대중교통을 타고 오지만 그 대중교통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 시간에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예배를 올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많은 곳을 살펴보면, 인간의 종교생활은 모두 자가당착 혹은 이율배반적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는 인본주의 가장 꼭대기 바벨탑 입니다. 예수님의 광야 3시험 중 마지막 시험이기도 하죠. 모든 성도가 볼 수 있는 성전의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고 천사가 수종들게 되면 이후 모든 성도가 우러러 볼 수 있는 훌륭한 종교인이 되는 것을 유혹한 시험이죠. 우리는 모두 교회에서 박수받는 훌륭한 신앙인이 되고자 하지 않습니까? 그게 2천년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죄인들은 자신이 그렇게 존경받는 종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가슴을 치며 그냥 예수님만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 예수님을 이용해서 나의 소원성취(이 땅에서의 행복, 죽어서의 행복)를 위한 인본주의 바벨탑 최상층입니다. 물론 선택받은 자들도 이 과정을 지나갑니다. 하지만 종국에는, 그들은 나의 종교생활이 인본주의 바벨탑의 꼭대기를 오르려는 것임을 알게 되죠. 그러면서 진정한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됩니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모두 이런 증상이 나타나죠.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결국 끝까지 ‘훌륭한 기독교인’ 으로 남습니다.
선택받는 자들은 결국 '훌륭한 종교인'이 되기 위한 일(발버둥)을 멈추고 예수님의 품에 안식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정의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