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완료)

눅17:33-35(24.03.26.화)

은혜바라기 2024. 3. 26. 08:38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없음)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33절은, 군대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죠. 그래서 흡사 행위를 강조하는 구절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한 구절도 행위가 결론인 말씀이 없습니다. 물론 1차적으로 모든 성경은 행위를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어 보겠다고 뛰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차적으로 ‘그럼 한번 이렇게 해보라~~’라고 행위적 명령을 던져주시죠. 

 그러나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나는 할 수가 없구나~~’의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긍휼만을 소망해야 하죠.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이 실체가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33절도 1차적으로는 우리에게 명령하는 말씀이지만 우리는 결코 이것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완전히 순종하신 분이 계시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완벽하게 다시 사셨습니다. 그런데 죄인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잘못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잘못된 죽음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택한 그 분의 신부들(교회)까지 모두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요구한 유일한 댓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인본주의 안에 살면서 우리 삶을 보존하고자 먹고 입고 자는데만 열심을 냅니다. 인본주의 바벨탑을 쌓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인본주의 삶은 결국 죽는 자의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후 34-35절을 보면, 둘이 똑 같은 일을 해도 하나는 데려감을 얻게 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 34-35절의 초점은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데려가는 자, 즉 예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대인사역은 십자가의 우편강도 에피소드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로다’라는 완벽한 구원 선언을 받은 인물이죠. 예수님의 전 생애 중 이렇게 까지 확실하게 구원을 못 박은 자는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런 메시지를 주셨을까요? 이 자는 그냥 강도일 뿐입니다. 그는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어떻게, 왜 구원을 받았을까?  그 힌트는 그의 말에 있습니다. 

 우편에 있는 강도는 ' 우리는 죄인이지만 이 분은 죄가 없다.'는 것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해했으며,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것으로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만 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고 자기의 행위, 노력, 공로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어렵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것을 인식 하지만 뿌리 깊게 이해하지 는 못합니다. 성경은 ‘복음을 뿌리 깊게 이해하는 것’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뿌리 깊게 이해되면 생기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이 믿음을 감정의 한 요소로 생각해서 믿음이라는 감정을 다잡는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죠. 즉, 믿음 조차도 쌓고 쌓는 행위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인간이 죄인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뿌리 깊게 이해하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알려주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선택'에 의한 것 뿐입니다. 구약을 읽으면서 이상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왜 하필 이스라엘인가? 왜 에서는 버리시고 야곱인가? 성경의 이런 이야기들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너무 일방적인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선택'의 가장 핵심은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긴 시간의 묵상이 필요한지 아셔야 합니다. 인생 80년이 이 작업을 하는 시간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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