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두로와 시돈, 그리고 가나안, 모두 이방인(죄인)을 뜻합니다. '귀신이 들리다.'라는 것은 인본주의에 정신이 묶여 있는 것을 가리키는 표지판입니다. 당시 귀신들린 여자의 딸이 진짜로 귀신이 들린 것인지 아닌지는 촛점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용하여 복음을 설명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 상황이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촛점은 무조건 복음에 있습니다. 이 방향성(설명하려는 목표가 무엇인가?)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조금만 방심하면 이 촛점에서 무조건 빗나가죠.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인본주의에 속한 자는 절대 복음의 진영으로 들어갈 수 없다.' 입니다. 그에 대한 성경의 표현으로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라고 표현, '나는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는 표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는 표현이 적혀 있죠. 이것을 '제한속죄'라고 합니다. 즉, 구원은 예정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여자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하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딸이 나았죠. 즉, 구원받는 상징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면 과연 이 여자의 고백이 '너무 간절하여' 예수님이 구원의 원칙을 바꾸었을까요? 절대 그럴 수가 없죠. 하나님은 절대 원칙을 바꾸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죠. 우리가 뼈속까지 인본주의에 물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여 이 부분은 어떤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자세히 풀어보죠.
굉장히 복잡한 구조이므로 잘 이해하시고 따라오세요. 처음 설명드린 부분, 즉 '예정된 자들만 구원 받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 여자의 딸은 예정된 자라는 말입니다. 이 여자의 고백을 들어보면 '본인을 개'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은 완벽하게 복음의 진영에 들어 온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죠. 그래서 이 여자는 구원을 받을 원래의 대상이었던 것이죠.
즉, 한 여자로 두 가지 복음을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대상인 죄인(이방인)을 1차로 정의하시고, 2차로 구원받을 자를 정의하신 것입니다. 이 여자를 통해 두 가지를 다 설명하신 것이에요. 그러니 인본주의적 해석으로는 모순이 생길 수 밖에 없죠. '어떻게 같은 여자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나! 모순이자나!!'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라는 진리에 기초해서 해석을 하면, 이 여자는 단지 상징일 뿐이므로, 죄인을 설명하기도하고 이방인을 설명하기도 하고 택함을 받는 자를 설명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에피소드는 성경에서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복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성경은 모순이 나죠. 성경은 이렇게 같은 인물과 사건으로 다양하게 복음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가지만 소개하고 마치죠.
노아가 방주에 식구들을 데리고 들어가죠. 이 때 노아는 '예수'의 상징이죠. 그리고 그 식구들은 '교회'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데리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고 나서 하체를 다 드러내고 술취해서 뻗어있는 모습이 나오죠. 이 때는 죄인의 상징입니다. 이 때 함이 그것을 보고 알리죠. 이 때 함은 죄인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셈은 노아의 하체를 덮습니다. 즉, 죄를 덮는 역활인 '예수'의 상징이죠. 이 때 자신의 죄를 덮힘받은 노아는 '교회, ,즉, 선택받은 나'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노아는 상황에 따라 '예수' 와 '죄인'과 '교회(선택받은 나)'로 다 표현이 됩니다. 한 개의 질문을 던지면서 묵상을 조금만 더 해 보죠.
"여러분은 돈과 예수님 중에 무엇을 더 사랑하십니까?"
아마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은 '돈' 이라고 말할 것이고, 교인들은 대부분 '예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복음을 정확히 알게 된 자들은 대답을 '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돈 보다 예수님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절대 변할 수 조차 없다는 것도 알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대신 오셔서 '참 삶(다 이루심)'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이 메카니즘을 이해하시는 순간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교회밖의 타락한 죄인들도 '돈', 복음을 알게 된 자들도 '돈' 이 둘의 결론은 희한하게 같죠?(물론 본질적 성격은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에 전통 교인인 바리새인이 아닌 교회 밖의 죄인, 새리, 창녀들과 같이 지낸 것입니다. 이 자들이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자들이라는 것을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죄인, 새리, 창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예수님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죄인, 새리, 창녀를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그 때의 나는 죄인, 새리, 창녀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을 바라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 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죄인'이 아닌 '교인'이 되어버립니다. 휼륭한 신앙인이 되고자 열심히 노력이라는 것을 하죠.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즉,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갈라지는 순간이죠. 이것을 이렇게 대부분의 목사들이 시작하죠. 맹인이 시작하고 나머지 맹인이 따라가는 형국이 되죠. 그들은 심판의 갈림길에서 항상 좌측으로 가죠. 그 좌측의 길이 '휼륭한 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의 시각에 묶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중의 소수가 우측으로 갈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은 목자의 소리를 듣는 자들이라고 하죠. 즉, 복음을 듣는 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죽어 있는 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휼륭한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죠.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안아서 좁은 길인 우측길로 들어갈 분, 즉 예수님만 바라보는 자들이 되죠. 그들은 눈은 오직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죠.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과 복음의 진영에 들어 있는 자들의 시각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아래의 구절 요약본을 통해 구분해 드리고 묵상을 마칩니다.
'선한 경주를 하기 위해 예수님만 바라보자'
인본주의적 시각 : 선한 경주를 하는데 그 결승점에 예수님을 세워두고 그 곳으로 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달려가자
복음적인 시작 : 나는 선한 경주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주저 앉아 있는데 나를 안고 계신 예수님이 선한 경주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나는 그 분의 품 속에서 감격해서 그 분의 눈만 바라보며 있는 상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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