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0:1-16(22.01.07.금)

은혜바라기 2022. 1. 7. 09:56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성경은 비유된 문장을 논리적으로 파악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식로 해석이 되면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성령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목사, 집사, 성도 그 누구던지)복음의 진영에 들어와 있는 자, 즉 눈을 뜬 자들만 해석이 가능합니다. 둘째. 복음을 알려 주시는 성령께 기대어 하나님의 촛점(시각)을 유지하면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 '촛점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경의 본질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장님으로 태어난 두 명의 형제가 있다고 가정해보죠. 이 두 형제는 '태양'의 모습이 항상 궁금해서 늘 태양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고 해보죠. 그 중 한명이 20살 되던 날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해보죠. 눈 뜬 형제가 눈을 뜨지 못한 형제에게 태양의 색깔이나 밝음의 정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물며 영적세상에 대한 설명인 '복음'은 이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면 '그냥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됨'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너무 중요하니까 다시 한번 또 반복하죠.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모든 인간 혹은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다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은 '더 집중해서 믿자' 혹은 '그래 한번 더 열심히 믿어보자' 가 가능한 인본주의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외부에서 성령께서 침노하여 들어와서 '알려 줌' 즉, '눈을 뜸'입니다. 그래서 진짜 실체를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태양을 한번도 못 본 장님이 태양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이 인본주의 믿음, 즉 상징적 믿음입니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되면 태양이 '그냥 보이죠' 이때 태양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참믿음'입니다. 

 

 오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죠. 오늘의 말씀의 주제는 명확합니다. 천국은 나의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된 속제, 불가항력적 은혜' 이 세가지를 이야기하고 계시죠. 이 세가지를 풀어서 에피소드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보면 삯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삯의 정체는  무엇일가요? 눈치 채셨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우리의 천국이시죠.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천국은 관계의 개념입니다. 명심하세요. 천국을 장소로 생각하는 이유는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의 폐해입니다. 

 매우 일찍 포도원에 들어간 자들은 자기의 삯을 행위(자신의 노력)로 판단하고 하나님께 원망을 품죠. 그러자 하나님이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라고 하시죠. 이 자가 행위를 기준 삼으니 하나님도 그 행위로 그 자를 판단하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가라'고 하시죠. 하나님과 영원한 분리입니다. 관계의 단절이죠. 지옥입니다. 지옥도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지옥도 정확하게는 관계의 개념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살만한 이유는 이 세상을 아직 하나님이 관여(이것을 섭리라고 합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끝에 오는 종말적 지옥은 완벽하게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죠. 그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을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은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자연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본질을 품고 있습니다. 태양의 따뜻한 빛, 생명을 살리는 빛, 물이 주는 생명, 녹색의 잎에서 나오는 꽃이라는 생명, 땅이라는 무가치 티끌에서 씨(생명)가 심겨지면 나오는 생명인 열매 등등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설명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본질을 품고 있죠. 그런데 지옥은 이 본질이 거두어지겠죠.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인간의 욕심과 두려움만 남은 영원한 세상을 상상해보세요. 그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온 자, 즉 거의 일하지 않고도 삯을 받은 자는 그것을 "은혜"로 여기게 되죠. 그러나 잘 생각해야합니다. 여기서도 내가 기준이 되어서 '그래! 은혜로 여기는 노력이 나를 천국에 갈 수 있게 하는 구나.'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은혜 마저 노력(행위)으로 바꾸려하죠. 이 비유의 촛점을 다시 한번 묵상하십시오. 처음 온 자보다 나중 온 자가 스스로 은혜를 더 많이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은혜로 생각하게 끔  '상황'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알게 됨'이죠. 

 

 이것을 구약에서는 '광야'라고 표현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 상황을 말합니다. 이 광야같은 우리의 인생은 파리한(약한) 일곱 암소가 살진 일곱 암소를 잡아먹는 형국으로 전개됩니다. 7이란 천국의 숫자입니다. 즉, 고난 90%, 약간의 즐거움 10%라는 인생의 구조로 선택받은 자들에게 천국을 설명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신부를 찾아서 그 자들만 복음을 알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이죠. 이렇게 눈을 뜨게 된 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가치없는 자인가를 알게 되어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죠. 이 자들은 자신이 지금껏 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리고, 봉사하고, 일한 것이 완벽하게 무가치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런 것들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아무 일한 것이 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의로 여김받게 되어 천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

 어제 마지막에 나온 말씀을 오늘도 반복하십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이 말씀은 '오랜 신앙을 가진 자가 새 신자보다 못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먼저 된 것은 율법, 행위, 구약을 말하고 나중 된 자는 예수, 신약, 복음을 뜻합니다.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말입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도 성경을 읽으면서도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떤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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