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께서 예수살렘으로 가시는 것' 이란 예수님께서 천국을 만들어 가는 과정(길)을 뜻합니다. 그래서 '길에서 이른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이죠. '내가 곧 길이요'라는 말씀을 기억하시죠? 또한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라고 하시죠. 12제자는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따로'라는 것은 인본주의와의 분리를 뜻합니다. 분리는 히브리어로 거룩이라는 뜻이죠. 이 모두를 종합해서 말씀드리면, 천국으로 가는 길은 예수님이 교회를 인본주의에서 분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보라 우리가 예수살렘으로 올라가노니'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 뒤의 고난은 '인자'가 받는다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인본주의와 분리하는 작업을 하셔서 '우리라는 교회'를 완성하시지만 이것은 온전히 예수님께서 홀로 감당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예수님은 고난을" 이것이 복음입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라고 하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인본주의 '최고의 선'입니다. 그들에게 넘겨져 죽임받게 된다고 하죠. 인본주의 종교의 최고의 선은 예수를 죽이는 정점에 선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을 율법과 행위로 이해해도 됩니다. 즉, 율법과 행위가 예수님을 못박는 것이죠.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서 이 같은 짓을 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 때의 이방인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즉, 나의 옛자아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방인은 '악'이죠. 그리고 자신들은 '선'한 존재죠. 그런데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두 부류는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는 박해는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하죠.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계속 반복 되는 이유는 선택받은 자의 삶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고난이 생길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체적 고난은 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셨기에 우리는 감당할만한 정도로, 혹은 넉넉하게 이길 정도로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당할 만한' 혹은 '넉넉하게 이길' 이라는 성경구절을, 내가 인생의 고난을 잘 이기거나 감당할 수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에만 관심이 있으시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옛자아를 '죽이시는 데'까지 몰고 가십니다. 이 과정이 너무 너무 아파요. 그런데 그렇게 아플 때 예수님이 우리를 찾을 것이라는 말씀이고, 우리에게 '내(예수님)가 이미 다 이루었다.'를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이미 이긴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넉넉하게 이긴다'라고 합니다.
선택된 자들은 옛자아가 박해를 받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반대로 옛자아가 원하는 것을 계속 얻게 것이 얼마나 저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고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떼 쓰니 메추라기 고기를 보내 주고 나서 그들의 이빨에 낀 고기가 빠지기도 전에 다 죽여버리신 에피소드가 있죠. 이 에피소드의 해석을, 감사를 안해서 죽었다고 해석하는 오류에 빠지면 안됩니다. 인본주의 종교의 가장 큰 폐해가 바로 give and take 식의 성경해석입니다.
이 에피소드의 뜻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자아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게 되면 우리의 옛자아는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진짜 영원히 죽는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교가 좋아서 교회 인원수가 늘어나고, 정치를 잘해서 교회 질서가 잡히고, 인격이 잘 훈련이 되어서 인정받는 목사가 되었다고 해도 복음적 측면에서 보면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선택된 자들의 첫 열매인 예수님의 생애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선택을 받아 예수님의 품에서 태어난 우리의 인생은 예수님과 동일하게 '자기 십자가'를 지며 살게 됩니다. 이렇게 나를 가장 박해하는 자가 바로 나의 옛자아입니다. 단지 실체적 고난은 예수님이 전부 다 받으셨고 우리는 믿음을 얻게 되는 용도의 상징적 고난만 받는 구조죠.
우리가 복음에 눈을 뜨게 되면 이 세상의 가치관과 완벽하게 분리된 진리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나의 옛자아는 끊임없이 인본주의 바벨탑의 꼭대기를 추구합니다. 이 두 자아가 끊임없이 충돌하죠. 나의 옛자아는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고발하고, 박해하죠. 그런데 이런 옛자아의 박해 덕분에 나는 오히려 예수님의 필요성을 알게되는 방향(길)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이방인의 유혹,고발 그리고 박해 때문에 결국 십자가를 완성하는 것과 완벽하게 닮았죠. 재밌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