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0:20-28(22.01.11.화)

은혜바라기 2022. 1. 11. 08:39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베대의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이죠. 이들의 어머니를 소개할 때 "예수님의 제자의 어머니"라고 표현하지 않고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이라고 표현을 했다는 것은 이들의 어머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인본주의에 묶여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위대한 통치자의 우편과 좌편에 해당하는 권력, 명예, 인기입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복음과 전혀 다른 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식을 낳고 기르는 시스템을 만드신 이유는 두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식의 방향에서 보면, 현실의 부모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역활로, 자식은 부모에게 끊임없이 요구만하는 죄인의 역활이죠. ( 자식은 절대 부모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필요만 할 뿐이죠. 물론 부모를 사랑하는 듯한 행위를 표현할 때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의 또 다른 요구(재물, 관심)를 얻어내기 위한 것 뿐이거나 자신의 가치(효라는 세상의 칭찬 혹은 자기 자신의 만족감)를 실현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나쁘다, 좋다로 판단하면 안됩니다. 이런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

 

 부모의 방향에서 보면, 이것은 자식을 통해서 다시 한번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내 배에서 나온 자식은 바로 '나'입니다. 즉, '나의 지체'를 설명하기 매우 좋은 표지판입니다. 사람이 성인이 되어 복음을 알게 되었다고 해 보죠. '복음을 알게 되었다'라는 것은 인간의 무가치, 무능력, 티끌됨, 죄인됨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낳아서 기르다 보면 내가 포기 했던, 이 세상 '인본주의에서의 잘살기'를 다시 자식에게 가르치고, 요구하고, 희망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절대 인본주의 바벨탑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면서 더 깊은 복음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방향성이 이해가 되는 분만이 창세기 마지막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마지막에 야곱이 자신의 12아들(지파)에게 죽기전에 유언축복을 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런데 축복이라고 해 놓고 절반의 저주를 퍼붓습니다. 야곱은 완벽하게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자식은 이런 축복을 통해서 복음을 볼 수 있게 되고, 어떤 자식은 이런 저주를 통해서 복음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즉, 목적이 이 세상 잘살기가 아니라 '복음을 알게 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이란 당연히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너희가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계시죠. 그런데 그 다음 구절에 '너희가 과연 내잔을 마신다'라고 돼 있죠. 이것은 실체적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적 십자가는 오직 예수님만이 감당하시죠. 이 말은 "자기 십자가"를 뜻합니다. 즉, 상징적 십자가를 뜻하죠. 내 옛자아가 받는 고난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는 시스템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고난을 대하는 세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인본주의(세상) = 고난이 오면 스스로 대처(좌절, 노력, 편법)  2.인본주의 종교인 = 고난이 오면 예수님을 통해 고난을 극복(고난극복으로인한 행복이 목적)  3. 복음의 사람들 = 고난이 오면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봄(오직 예수님이 목적)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되고 종이 되는 자가 으뜸이 된다'의 의미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을 위해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그 노력의 본질은 복음을 이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즉 나는 절대 섬기는 자가 될 수 없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섬기는 자와 종이 되는 자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래서 그 분만이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믿게 되면서 거저 천국에 가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는 기회를 인생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죠. 이 뜻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구절이 바로 다음에 나오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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