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무화과나무는 이 세상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 나오는 무화가나무가 잎사귀만 맺고 열매를 맺지 못하죠. 열매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예수님을 맺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잎사귀만 무성하게 맺는다고 하죠. 이것은 인본주의 행복만을 위해 사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즉, 재물, 건강, 권력, 명예, 인기, 지위 등등이죠. 이것은 결코 인생의 진정한 열매가 아닙니다. 오직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결국 예수님이 목표되지 않는 삶은 심판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 제자들이 왜 무화가나무가 말랐는가? 라며 반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무화가 말라버린 본질적 이유에 대하여 답변을 하셔야 하는데 제자들이 듣기에 엉뚱하게 '믿음'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제자들은 기적이 일어난 조건과 이유에 대하여 물어 본 것이지만 예수님은 심판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화가 나무가 여기서 등장한 이유는 예수님의 심판권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는 것이죠. 인본주의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행위입니다. 결국 '선택받은 나'의 입장에서 심판이란 복음(천국)을 말하는 것이죠.
여기서 등장하는 '믿음'의 출처는 오직 예수님께만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가 마땅이 가져야 할 믿음은 예수님께서 심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은 '내가 예수를 믿어서 잘 살게 되자, 혹은 예수를 믿어서 천국에 가서 잘 살자'로 생각하죠.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형태의 믿음은 참믿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지식은 될 수 있지만 진정한 실체로의 믿음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은 예수님만 가지고 계시죠.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라는 말은 '이렇게 무화과 나무에게 행한 상징적 심판에 대한 가르침 뿐 아니라' 라는 말입니다. 이후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리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는 말이 이어서 나오죠. 여기서 '산'은 성전을 뜻하며, '바다'는 심판을 뜻합니다. 왜 산이 성전일까요? 예루살렘의 성전이 산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인은 '산'하면 바로 '성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다'로 표현 된 심판은 물에 뜬, 즉 방주에 탄 자들의 입장에서는 구원이라는 심판으로, 물에 수장된 자들의 입장에서는 멸망이라는 심판으로 결론이 나게 되죠.
정리해보면, 너희가 믿음을 받게 되면, 즉 복음을 알게 된다면 ,이렇게 무화과 나무에게 행한 상징적 심판에 대한 가르침 뿐 아니라 너희가 의지하는 모든 교회들 조차 심판을 받아 구원과 멸망으로 나누게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시죠. 여기서 말하는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이란 복음을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성령께서 알려 주시는 복음이죠. 즉, 성령께서 복음을 알려 주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인해서 구원이 나누어지게 되고 이것을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의 말씀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 인본주의 종교과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들이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지 적어 보죠. 그래야 이해가 빠릅니다.
인본주의 종교는 오늘의 말씀을 '무화가 나무를 마르게 한 작은 기적 뿐 아니라 산을 바다로 옮길 수 있는 큰 기적을 갖기 위해서 더 믿음을 확고하게 만들어야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을 실행할 수 있는 믿음은 오직 기도로만 가능하므로 이런 큰 기적을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면 다 받게 됩니다.'로 해석하죠.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들은 '무화가 나무가 예수라는 열매를 맺지 못해 심판을 받은 것 처럼 복음을 알지 못하면, 즉 믿음(앎)에 있지 않으면 성전도 바다에 빠져 심판 받게 되고, 반대로 복음을 아는 자들은 그 바다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 이렇게 구원을 구분할 복음은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것인데 하나님께 믿고 기도하면 성령을 주실 것이다.' 라고 해석합니다. 완벽하게 다르죠?
여기서 또 의문이 들죠. 기도해서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이 왜 꼭 성령 뿐인가? 누가복음 11장을 보죠.
"눅11:9-1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이 오늘 마지막에 나온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이 유명한 눅11:9의 말씀도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 그래~~ 열심히 기도하고, 찾고, 구하면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것이야~~'라고 생각을 하죠. 그러나 정확하게 13절에 가면 '맨붕'이 오죠. 갑자기 문맥파탄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성령'이 등장하죠.
여기서 잘 생각을 해 볼 것이 있습니다. 제가 갑자기 '맨붕'이라고 했죠. 이것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점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진영에 있는 자들의 시각에서는 '성령'이라는 결론이 맨붕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제가 글 재주가 없어서 잘 설명을 못드리고 있는데, 개떡같이 설명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즉, 결국 성경은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를 잘 설득하여 복음을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태초에 선택된 자들을 성령께서 찾아와서 눈을 뜨게 하여 말씀 안의 본질을 알려 주는 책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잘살기'가 목적인 사람의 시각과 이 세상이 '무가치'함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의 길'에 서 있기만 바라는 사람의 시각의 차이를 해석의 방법과 기술로 매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더 알아야 합니다. 이 믿음 조차 오직 예수님만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에 해당하는 복음은 우리가 원해서 혹은 우리가 기도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참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원하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고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어서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된 것인데 이렇게 알게 된 것을 다시 참믿음이라고 합니다. 어렵죠? ㅎㅎㅎㅎ"입니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죠? 그런데 이것을 표현한 말씀이 바로 아래의 이 말씀입니다.
"롬1:17상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하나님의 의 = 예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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