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술

(특별묵상) 술에 관하여...

은혜바라기 2022. 2. 3. 08:52

 기독교에서 술을 먹지 말아야 하는가? 먹어도 괜찮은가? 아니면 먹어도 괜찮지만 술에 취하지 않을 때 까지만 먹어야 하는가?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술취하지 말라'는 의도는 무엇일까? 

 오늘 특별 묵상으로 ‘술’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술’의 위치가 가지고 있는 위상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술을 마시는가? 마시지 않는가?’로 믿음이 있고, 없고를 판단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죠. 실제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매우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반복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술’의 정체를 낱낱이 살펴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술은 먹어도 됩니다’ 술은 믿음이나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당연히 구원에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씀드리면 술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음식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고 세상에 등장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약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므로 먹어도 되겠네요??  맞습니다. 마약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먹어도 됩니다. 그런데 마약은 원래 의료용(수술용 마취)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죠. 여기까지가 우리가 사용해도 괜찮은 범주죠.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변칙적인 즐거움의 용도'로 변형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인본주의 악'의 방향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마찬가지도 '칼'도 요리를 위한 도구로 하나님이 허락하셨지만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하면 잘못된 것이겠죠. 이제 이 방향성이 이해가 되시죠? 그런데 '술'은 실제로 목적 자체가 사람이 먹고 즐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주에 들어갑니다. 

 가장 확실한 근거는 예수님도 식사 때 마다 제자들과 술을 드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창녀, 세리, 죄인들과 함께 드셨죠. 일부 목사들은 당시 중동 지방의 문화에서 가벼운 술은 음료의 범주라고 설교를 하지만 이것은 논리적 모순을 예외라는 방법으로 합리화한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요. 보지 못하는 장님이기 때문이죠. 

 가벼운 술이므로 예외이라구요? 그럼 구약으로 가 보죠. 신명기 14장을 보면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대하여 하나님이 이렇게 설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신14: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여기서 보면 가벼운 술인 포도주 뿐 아니라 ‘독주’도 구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라고 분명히 장소(교회,제사)까지 지정해 주시고 이 후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찬양,찬송)을 명령하셨습니다. 

 구약만 그렇다고요? 그럼 신약에서 찾아보죠. 예수님은 당연히 식사 때 술을 드셨다고 말씀드렸죠. 그럼 바울도 살펴보죠. 

 “딤전5:24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신약에서도 바울은 포도주를 사용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약으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상관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술은 조금 먹던 많이 먹던 농도만 다를 뿐 취기는 누구나 올라 옵니다. 

 이런 말씀들이 존재하는 이상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는 논리는 스스로 만든 답을 정해 놓고 합리화 시키는 것 뿐 입니다. 고로 다시 결론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술은 드셔도 괜찮습니다.' 기독교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에는 더 더욱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진짜로 우리가 알아야 할 ‘본질’ 이 남아 있죠. 성경이 말하는 ‘술 취하지 말라’는 말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표적인 구절을 보겠습니다. 

 “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

 ‘이것 봐 바~~ 술 취하지 말라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잖아~~’ 라고 말씀을 하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다시 복음에 관한 묵상을  잠깐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창세기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매우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세상이 결국 멸망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멸망할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멸망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레7:21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이 말씀도 매우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선한 하나님께서 만드셨죠. 그런데 ‘부정한 짐승이 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부정한 짐승을 만드셨다?’ 이것도 명백한 모순입니다. 

 이렇게 인본주의 논리로 보는 성경은 수 없이 많은 모순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성경은 모순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말씀이 모순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 즉 우리의 기준으로 해석하므로 성경이 모순된 것입니다. 

 이렇게 수 많은 성경의 모순은 단 한가지 조건만 추가되면 완벽하게 통일성을 가진, 단 1도 모순이 없는, 신학적으로 말씀드리면 무오성을 지닌 말씀이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천지창조의 모든 것은 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든 상징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교할 만한 부정한 짐승도 만든 것입니다. 즉, 흰색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검은 색을 만드신 것이지요. 또한 그 모든 것은 그 책임을 다하면, 즉 모든 설명이 다 끝나면 실체를 위해서 퇴장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천지창조와 멸망은 한 세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드린 ‘어떤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한 모든 스토리를 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절정, 즉 복음 스토리의 꼭대기에 서 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만약 여기 까지 이해가 되신 분이 있다면 이제부터 ‘술’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아듣게 되는 출발선은 ‘출애굽’입니다. 애굽은 인본주의를 상징합니다. 고로 우리는 인본주의에서 분리 되면서 복음을 시작하는 것이죠. 이때 우리를 인본주의에서 분리하는 것이 '어린 양의 피(예수님의 피=십자가)'입니다. 당연히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견인하시죠.  

 '죄'의 정체는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것입니다. 과녁에서 벗어난 것이죠. 과녁에서 벗어난 인간이 스스로 만든 세상이 '인본주의'입니다. 신본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인본주의(나 혹은 나의 확장체)에 묶여 살게 되죠. 그래서 복음은 우리가 인본주의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 안으로 숨으라고 말씀하시죠.

 

 복음은 사실 매우 간단합니다. '인본주의 분리 + 예수님의 십자가 숨기'가 전부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 인본주의 속성을 가장 잘 대표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술 취함’입니다. 

 인본주의 속성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인본주의에 묶여서 오직 그 꼭대기만 바라보며 열심과 노력으로 그 인본주의 바벨탑 꼭대기를 오르려는 모양새입니다. 천원을 버니 만원을 벌고 싶고(경제인), 인기를 끄니 더 인기를 끌고 싶고(연예인), 권력을 얻으니 더 큰 권력을 얻고 싶죠(정치인). 이렇게 인본주의 바벨탑의 꼭대기로 점점 더 깊숙하게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듭니다. 이것을 인본주의 기준으로 보면 점점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이 느껴지겠지만 복음의 눈으로 보면 반대로 더 깊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점점 더 땅에 묶이는 것이죠. (땅 지 묶일 옥 = 지옥입니다. )  성경은 이런 인본주의 속성을 경계하여 복음으로 방향을 바꾸도록 가르치죠.

 그런데 위의 문단을 잘 묵상해 보세요. 이런 인본주의 속성을 매우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딱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술 취하는 것’과 완벽하게 닮아 있죠. 술을 한잔 먹으니 더 먹고 싶고 더 먹으니 더 술에 빠져 들죠. 결국에는 술이 인간을 먹고 취해 흔들리면서 인간의 품위를 잃어 버리고 비참한 모습이 됩니다. 정확하게 이 모습이 인본주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인본주의에 묶여 그 곳만을 바라보는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에 바로 붙여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에 묶여 있지 말고 성령이 인도하는 복음의 길을 걸으라’는 말씀이지요. 구약의 내용으로 각색해 보면 ‘애굽에 묶여 포로생활에 취해 있지 말고 성령이 인도하는 출애굽을 하거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전부 통일성 있게 이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야 합니다. ‘방탕’이라는 단어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함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에서 ‘방탕’이라는 낱말 때문에 우리는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더 오해합니다. 

 보통 ‘방탕’이라고 하면 막 사는 것을 말하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방탕’의 정확한 의미는 ‘낭비’입니다. 히브리 사전을 보면 방탕의 뜻이 낭비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그 분이 설명하는 복음을 알아듣기를 바랬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바램에서 벗어나 있는 시간을 하나님의 방향에서 보면 ‘낭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방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함이니”라는 뜻은 인본주의에 묶여 그것만 쫓는 인생은 완벽하게 낭비하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복음을 알아가는 시간을 낭비한다는 의미죠. 

 성경에서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모두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술은 좋은 뜻으로도 인용이 됩니다. 즉, 구약의 제사 중에 포도주와 독주을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해라, 예수님과 포도주를 마시고 그 분의 보혈을 생각해라. 디모데에게 술을 권하면서 건강을 살펴라(여기서도 건강은 정확하게 영적인 것을 상징하는 표지판입니다. )

 이런 깊은 복음의 가르침을 다 버려두고 지금의 교회는 술 먹는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 술 안 먹는 사람은 믿음 좋은 사람으로 나누는데 한 눈 팔려 있죠. 이미 갈 때 까지 간 기독교입니다. 

 술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술은 건강을 생각해서 조금씩만 드시면 삶을 조금 활기차게 해 줄 수 있죠. 술을 먹으면 욕하고 때린다고요? 술 때문이 아닙니다. 술의 역할은 그 사람의 마음 중심을 꺼내는 도구일 뿐입니다. 즉, 술 먹고 욕 하고 때리는 사람은 그 사람의 중심에 분노와 폭력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알고 말씀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재미있게도, 성령충만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말씀을 나누고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드러내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술이 그 사람의 중심 생각을 더 많이 끄집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은 욕과 폭력도 끌어 내지만 복음과 말씀도 끌어 냅니다.

 

  예수님께서 2024년도에  오셨다면 술 대신 '핸드폰'으로 복음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에서 인본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핸드폰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로 예수님께서는 '핸드폰에 너무 치중하지 말고 성령충만해라~~ '라고 했겠죠. 이후 교회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핸드폰을 하는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 핸드폰을 안하는 사람은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또다른 율법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택받은 자들은 구약에서 '포도주와 독주를 먹고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라~'와 같이 '핸드폰의 성경 어플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항상 묵상하라~'로 알아듣게  됩니다.

 

 [[[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눈을 뜨고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의 문제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