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6:6-13(22.03.04.금)

은혜바라기 2022. 3. 4. 08:18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화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상징적 배경입니다. 나병이라는 것은 죄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죠. 나병은 몸이 썩어서 죽는 병인데 그 특징이 고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본인이 썩고 있는 상태를 감지하지 못하는 병이죠. 이것은 인본주의에 있는 우리들의 상태와 같습니다. 우리는 인본주의가 죄라는 것을 모르고 인본주의 꼭대기를 향하여 달려가죠. 이것을 '행복한 길'이라고 착각을 하며 달려 갑니다. 자기가 썩고, 죽어가는 중인 것을 모르죠. 이런 특징이 나병과 완벽하게 일치하기에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향유 한 옥합'을 부은 여인의 행동의 비유를 '이 여자처럼 귀한 것을 예수님께 바치자'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인본주의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행위로 해석하여 나의 열심으로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자의 행위에 포커스를 맞추지 말고 그 향유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졌다는 것에 포커스를 맟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적 시각에 포커스가 마추어지면 예수님이 안보이고 그 여인의 행위, 그 중에서 그 '비싼' 향유에 포커스가 마추어지죠. 

 '그 비싼' 에 포커스가 마추어진 제자들의 태도를 보세요. 이 제자들의 태도가 바로 인본주의 종교인들의 모습이죠. 그런데 제자들이 말한 방법이 틀린 방법은 아닙니다. 매우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휴머니스트적인 방법이죠. 그런데 이 런 인본주의적 방법에 갖혀 있게 되면 복음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병이라는 병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에 부제목을 단다면 '나병걸린 제자들'이라고 지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포커스를 옮겨주시죠. '이것은 내 장례를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이 여자를 사용해서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시선을 '인본주의 의로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참 의)'로 옮겨버립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오직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죠. 그런데 죄인 된 인간은 자신들의 기준인 인본주의 틀에 갖혀서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각을 복음을 볼 수 있도록 옮겨주시죠. 그 때 잠시 인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죄된 나를 볼 수 있죠. 이것을 증인된 삶이라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인본주의에 갖혀사는 죄인인지를 경험하고 스스로 증명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  이것이 증인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증인된 삶'이란 전도왕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전도는 내가 아닌 성령께서 하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의 결론을 '온 천하에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라고 하시죠. 역시 복음이란 낱말이 나오죠. '이 에피소드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란다.'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 여자가 행한 일이란 '십자가 복음을 드러낸 것'을 말합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치룬다는 것은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면 '예수님! 어서 나를 위해 죽으세요.' 라는 말입니다. 인본주의적인 마음으로는 매우 슬프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이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반복하면, '이 여자가 행한 일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는 말은 '나를 죽여 십자가에 매달아야 너가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반대로 생각을 하죠.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자!' 심지어 '예수님을 위해 죽자' 로 생각하죠.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심'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제 묵상에서 1천5백 동안 구약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제사를 통해 '예수님 죽이기'를 위해 칼을 가는 연습을 시켰다고 말씀드렸죠. 오늘은 그 예수님이 자신의 머리에 장례를 치루는 모습을 보고 '이 후에도 이렇게 나를 계속 죽여야 너희가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죠.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은 완벽하게 동일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복음에 대한 묵상을 쉬지말고 하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이런 노력과 행위를 했기 때문에 올라왔습니다.'라는 고백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 곳은 '우리는 예수님을 죽여서 그 피에 숨어 이곳에 올라온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존재들만 갈 수있는 곳이죠.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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