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가룟유다는 지옥을 갔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교회가 가진 입장이죠. 그러나 복음의 입장에서 본 저의 견해는 '모른다' 입니다. 그리고 굳이 꼭 한가지를 선택 하라면 가룟유다는 천국에 갔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천국은 우리의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서 오늘 본문을 묵상해 볼께요.
첫째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고 했죠.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매우 강력하게 '교회'를 의미합니다. 당연히 교회 건물이나 종교인 크리스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진정한 예수님의 지체이며, 선택된 자들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죠.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사도, 계시록의 12곱하기 12곱하기 1,000=144,000명의 인침받은 무리, 노아의 방주가 4각형의 3층이므로 4곱하기 3은 12 등등 이 밖에도 천국을 설명하는 12라는 숫자는 매우 다양하게 교회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가룟 유다를 설명하기 전에 그를 '열둘 중의 하나'라고 했죠. 이건 누가 바도 굳이 일부러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즉, 복음의 정의를 가지고 오늘의 말씀을 해석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기준에서 생각하면, 가룟유다는 이들 중에서 예수님을 배신한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고 끝 낼 문장이지만 하나님이 쓰신 복음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 열둘 중의 하나라는 말은 정확히 열둘을 대표한다는 말입니다. 즉, 다른 11명도 전부 배신자라는 말입니다. 다른 11명도 전부 예수님의 죽임에 가담한 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십자가 사건 전에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가죠. 수제자 베드로는 저주까지 퍼붓죠.
두번째는 가룟 유다를 가리켜서 굳이 '나와 그릇에 손을 함께 넣는 자'라고 표현을 하셨죠. 즉, 나와 함께 같은 '양식'을 먹고 있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양식'은 예수님 혹은 복음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우리말에도 비슷한 말이 있죠. '식구'라는 말입니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자를 '가족'이라고 표현한 말이 바로 '식구'입니다.
세번째는, 조금뒤에 나오는 구절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입장에서 본 천국행은 그 자의 행위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마지막 구절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다.'라고 표현 하셨죠. 이 말을 조금 의역하면, '그냥 태어나지 말고 천국에 계속 있지~ 왜 태어나서 가장 나쁜 역활을 맡았느냐? 불쌍하게도~'라는 뜻과 비슷합니다. (인본주의 드라마에 매몰되어서, 이 장면을 '스승을 배신한 제자'의 단순관점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천지창조를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단 한글자도 허비할 이유가 없으신 분입니다.)
가룟 유다는 선택된 자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삶'을 살아 내야 하는 자입니다. 연극 무대로 치면, 감독의 의도대로 역할을 수행하고 그 역할이 끝난 후에 감독으로 부터 수고했다는 칭찬을 받겠지만 그 자의 역할은 어떤 관객이라도 돌을 던질 수 밖에 없는 파렴치한 역할이죠. 여기서 이 무대 감독이 '그 역할이 너의 역할이다 '라고 확정지어서 이야기하시는 부분이 바로 유다가 '나는 (이 역활이) 아니지요.' 라고 하니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도다' 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지금부터가 오늘의 가장 중요한 결론입니다. 잘 들으세요. 오늘의 이 묵상이 우리에게 주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유다가 나쁜 놈인가? 아닌가? 천국에 갔는가? 지옥에 갔는가? 는 목적이 아닙니다. 오늘의 묵상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가 가룟유다'라는 것입니다. 즉, 나는 예수님이 선택한 12제자, 즉 교회가 맞고,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서 함께 양식을 먹는 가족(식구)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반듯이 나는 가룟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팔아넘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항상 예수님을 팔아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가룟유다와 같은 행위, 즉 죄라는 말입니다. )
그래서 직전의 묵상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 예수님께 장례를 치루는 장면, 즉 '어서 나를 위해 죽어 주세요'의 에피소드가 나온 것이죠. 그 뒤에 이 가룟유다의 에피소드가 나오면서 그 촛점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의 정체가 '12제자' 라는 것, 함께 그릇에 손을 넣고 양식을 같이 먹는 존재라는 것도 계속 함께 강조하시는 것이죠. (계속되는 역설의 비유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내일 묵상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먹는 성찬식입니다. 그러면 12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어 떡을 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파는 자는 가룟유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전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찬식의 본질은 '나는 가룟유다입니다. 이런 내가 예수님을 팔아먹고도 그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의 고백입니다. 첫 문장을 잊지 마세요 ' 나는 가룟유다입니다.' 이 첫문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본주의 종교인들의 생각은 '가룟유다처럼 되지 말자.'로 설교가 끝나겠죠. 그러나 복음에 있는 우리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식에서 참여하여 떡을 떼는 그릇에 손을 대는 순간, 나는 가룟유다가 되는 것이죠.
중간 중간 생략되었던 말씀을 보죠. '은삼십'은 소가 어떤 종을 죽이면 은삼십을 소주인에게 주고 그 소를 죽이는 율법입니다. 그래서 이 은삼십은 죽은 종의 값이기도 하고 이후 죽일 소의 값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종의 모습으로 온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종대신 죽어야 될 소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죠. 너무나 성경은 치밀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성경은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안 아무에게나 가서 . . . 유월절을 지키겠다' 왜 '아무에게나' 라고 했을까요?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만 있다면 '그 누구나' 구원을 받았죠. 이 '누구나'를 설명하시기 위해 '성안 아무에게나'라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죠. 중요한 것은 '누구 집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촛점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복음은 매우 쉽습니다. 복음은 역사와 인생과 성경의 주인공을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예수님의 자리에 서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노력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절대 성경을 제대로 해석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결국 기준이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인본주의 종교가 되어 버리죠.
인생도 그러하고, 역사도 그러하고, 교회생활도 그러합니다. 좀 직설적인 예를 들어보죠. 교회의 성가대 전체는 다 가룟유다입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은 결국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팔아 먹기 위해 나오는 목소리일 뿐입니다. 성가대가 아무리 믿음에 굳게 서서 찬양을 한다고 해도 그 안을 파헤쳐 보면 성도에게 칭찬받기, 하나님께 칭찬받기, 나 자신에게 칭찬받기의 핵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내가 강탈하는 것이죠. 예수님을 팔아먹고 그 자리에 내가 서서 그 가치인 은삼십을 내가 쥐고 있는 꼴이죠.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도저히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복음이 우리에게 들어오죠. '그런 너를 내가 사랑한단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미 예수님께서 그 값을 다 치루셨단다. 오늘도 예수님께 발을 닦아 달라고 하렴 그것이 전부란다. 이것이 전부라는 것을 아는 것이 예배란다. 그것이 복음이란다. 구원은 내가 홀로 다 이루었단다. 너는 그것을 알기만 하면 된단다.'
이런 복음을 알게 되는 은혜를 받으시고 평강을 얻으세요. 짐을 내려놓시고 진정한 자유를 얻으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