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6:31-35(22.03.10.목)

은혜바라기 2022. 3. 10. 08:19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성경에 기록된 '밤'은 빛이 없는 시간, 즉 복음이 감추어지는 시간, 즉 인본주의 시간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드신 빛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낮과 밤을 만드신 것도 역사에서 예수님의 있고, 없음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그래서 오늘의 말씀도 복음이 감추어지는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라고 되어 있죠. 그리고 그것은 이미 예언되어 있다고 나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방향에서 오는 은혜가 아니면 모두 예수님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라고 말씀하시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모든 제자들은 다 도망가죠. 그런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항상 배신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반대로 생각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예배드리고, 찬양드리고, 헌금드리고, 헌신을 하고, 전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죠.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가 아니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믿게 되어서'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정확히 우리의 모습입니다.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주님을 위해 죽을 것이다.' 입니다. 그러나 '절대 너희는 그러지 못한다' 라고 예수님은 결론짓죠. 그 이유가 '우리의 교만함을 꾸짓다' 혹은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신다'라는 하찮은 수준의 이유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감격 그 이상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만약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면 예수님 십자가의 필요성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방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즉,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실 방법이 없는 것이죠. 만약 우리가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거나,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1%라도 존재했다면 하나님은 그 1%의 방법을 사용하여 구원을 계획하셨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안타까운 마음에 우리의 가짜 노력을 그 1%라고 인정하시게 되면 십자가의 온전함이 무너져 버리게 되고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무효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99%천국 1%지옥 이라는 사랑의 개념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이 땅에서 우리가 그 1%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을 증인의 삶이라고 하죠.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나의 증인이 되어 나의 쓸모없음을 고백하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인정하게 되는 '증거를 모으는 삶'을 말하죠. 이 증거를 손에 쥐고 천국에서  예수님의 피에 숨어 영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천국에 가서 또 다시 사탄이 됩니다. 최고의 천사로 탄생이 되었지만 그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었던 사탄말이죠. 이 사탄을 놔 두시는 이유도 우리가 바로 이 사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하신 것이죠. 결국 사탄도 복음의 도구로 탄생된 하나님의 의도 중 하나인 것입니다. 또한 수제자 베드로도 교회의 대표로 예수님을 저주하고 배신하는 도구로 등장시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닭 울기 전에 세번 부인'하죠. '3'은 하늘, 즉 복음의 숫자입니다. 즉, 이것은 복음을 설명하는 에피소드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죠. 닭은 언제 울죠? 새벽에 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울죠. 그러므로 닭 울기 전이라는 말은 '빛이 없는 시간'를 말하고 빛이 없는 시간이란 '복음이 잠시 가려진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연결해서 이야기하면 복음이 가려진 인본주의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서 베드로는 계속해서 자기가 죽더라도 배신을 안한다고 하죠. 그리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한다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죠. 이 말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선택된 자들도 이 에피소드처럼 (성령께서 '복음 알려주기'를 잠시 멈춘다면)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갈릴리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갈릴리는 제자들이 다시 복음을 대하고 살아내야 할 인생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을 배신하고 돌아 선 자들은 다시 '인본주의 인생'인 '갈릴리'로 돌아가죠. 정확히 우리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은혜로 복음을 알아 듣고 감격하지만 곧 인본주의에 다시 빠져서 돈과 건강, 정치, 미래의 불안, 인생의 즐거움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기다리신다고 하시죠. 그곳에서 우리를 계속 복음의 길로 이끌고 우리를 자신의 등에 업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항상 주님을 배신하고 좋은 것을 쫓아 가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그 분의 어깨에 올리시고 복음의 길을 뚜벅 뚜벅 걸어가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거짓된 인본주의 삶의 가치를 부인하고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걷게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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