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오늘의 말씀은 두 가지 중요한 에피소드가 겹쳐 있죠. 첫번째는 예수님과 교회의 이야기, 두번째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첫번째는 예수님이 '기도행위'에 대하여 교회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시죠. 이 말씀은 우리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기도는 예수님만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의 기도는 예수님의 중요 사역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하는 동안 앉아 있으라고 하시죠. 그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방해만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예수님이 지정해 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어린 아이가 '내가 칼들고 주방에서 엄마를 돕는 행위'가 엄마를 방해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면 조금씩 성인이 되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죠. - 이렇게 복음에 눈을 뜨는 자들도 자신의 '티끌됨'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
예를 들어볼까요? 전쟁를 치루는 한복판에 어린 자식과 부모가 어떤 광장에 남겨졌다고 치죠. 그 때 부모가 잠시 먹거리를 구해 와야 할 때 어린 자식에게 요구할 수 있는 간절한 기대는 '여기서 꼼짝말고 기다려'입니다. 이 어린 자식이 그 무엇을 하려 해도 그것은 그 부모를 힘들게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아이의 행동은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서 부모님이 한 말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죠. 성경이 말하는 '오직 믿음'은 이것을 뜻합니다. 즉, '믿음'은 '그래 내가 믿음으로 이것을 할께~~' 가 아니라 '그래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이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의 방향성이죠. 이것을 표현한 말씀이 바로 '내가 기도하러 갔다 올 동안 여기 앉아 있으라'는 말입니다.
또한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아고보를 따로 데리고 게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시죠. 이들이 더 중요해서가 아니라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또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이 세명의 제자들에게는 조금 다른 지시를 하십니다. '깨어 있으라'고 하시죠. 그러나 이들은 계속 잠만 자죠. 이것이 우리의 모습(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도 결국 이것을 깨닫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오직 '나는 잠을 자고 예수님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시죠. '이제는 자고 쉬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고 하시죠. '십자가 사역에서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더 상기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두 부류의 제자들(남겨진 제자들과 3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같이 기도하자'라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이 괄호 안에 조금 깊은 복음을 설명하겠습니다. 매우 매우 신중하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제자를 드리도록 율법을 정하셨지만 그 제사의 목적은 '제사의 쓸모없음을 깨닫는 것'이 목적입니다. 즉,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진짜가 있는 것 같은데~~'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실체인 예수님이 오신 후 제사는 다 폐하여졌죠. 그런데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도의 수준을 단계로 밟아 간다고 가정하면 가장 최후의 단계는 바로 '기도의 행위'가 필요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기도는 오직 예수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과 둘째 우리가 하는 기도는 거짓되고, 허망한 것인데 이것을 성령께서 조금씩 알려주셔서 우리의 입을 막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하는 것이 참기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 물론 이 수준을 건너띄기 할 수는 없습니다. 즉, 이 글이 이해된다고 '기도를 하지 말자~'의 방향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그래 제사의 목적이 따로 있었구나~'를 이해했다고 구약 중간에 제사를 종료시켜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우시죠? 그런데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죠. 이것은 기도 뿐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생은 실체인 영적 삶의 그림자 혹은 표지판일 뿐이죠. 그러나 이것을 알게 되었다고 '인생을 마감하자~ 인생을 막살자'의 방향성을 갖게 되면 안되죠.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기독교는 일반적인 '종교'의 수준을 한참 상회합니다.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생각하실 때 '난 아직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
오늘의 묵상에서 중요한 또 다른 주제는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하시죠. 어떤 고민인지 바로 나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시죠. 이 잔은 당연히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그냥 '육체의 죽음 및 고통'정도가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신부들의 손에 죽어야만 하는 역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지옥이라고 하죠.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하죠. '뭐!~~ 3일 후면 살아나시는데!' 그러나 이렇게 '3일'로 시간을 맞춘 것은 3이라는 숫자가 성경에서 '복음'을 가리키는 숫자이므로 그것에 맞춘 것 뿐입니다. 실체적으로 영적인 시간으로는 '우리 대신 영원한 지옥을 가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고작 헌금 몇 푼 더 내고, 남들보다 몇 분 더 기도 시간 늘이고, 교회에서 지도자 행세하면서 평생 주를 위해 살았다고 자랑하고, 어쩌다 보니 사역하다 죽게 되니 순교했다고 떠들어 대는 행위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독하고 다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저같은 놈들에게 예수님은 '아니다~ 나를 모독하고 죽여야 너가 산단다.'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이 미친 사랑, 이 끝없는 사랑, 이 역설적인 복음을 이해 하십니까?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복음 앞에 서면 사실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자가 됩니다. 이런 복음의 안경을 끼시고 이번 주에 교회에 가셔서 '종교활동'을 하시는 자들을 살펴보세요.
창세기를 보면 주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죠. 이것은 번역을 한 단계 건너뛰고 한 것입니다. 정확한 번역은 흙이 아니라 먼지입니다. 혹은 티끌입니다. 이 먼지와 티끌은 그 의미가 '없음' 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없음'으로 창조하셨을까요? 그 전에는 '말씀'으로 지으셨으면서 왜 사람은 '없음' 이라는 티끌로 지으셨을까? 그 이유가 나오죠. 그 '없음' 안에 '생기(성령)'를 넣으니 그 때서야 '생령'이 되었죠. 즉, 인간은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는 모두 '없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예수님과 관계맺지 못하면 '없음'이라는 것입니다.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