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6:46-56(22.03.14.월)

은혜바라기 2022. 3. 14. 08:49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께서는 본인을 파는 곳으로 '함께 가자'라고 하시죠. 그리고 예수님을 파는 자인 유다를 굳이 12중의 하나인 유다라고 지칭합니다. 성경이 이런식의 화법으로 계속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가 예수님을 파는 자들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2는 교회입니다.)

 같은 의미로, 예수를 죽이러 인본주의 종교인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오죠. 그런데 그 중에 유다가 끼어 있습니다. 유다는 제자들 중 한명이고 그를 예수님을 죽이러 오는 무리 속에 넣는 장면을 굳이 연출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 무리를 보면서 '저런 나쁜놈'이라는 비판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저들이 바로 나구나'라는 인식이 목적입니다. 이 장면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는 것임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그냥 '저 사람'이라고만 지목해도 알아 볼 텐데 굳이 예수님께 입맞추는 장면이 나오죠. 이 장면의 앞뒤를 잘라내고 보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곧 교회에서의 우리의 외적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우리)가 예수님을 팔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고 하십니다. 즉, 유다(우리)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친구라는 표현은 모든 것을 서로 책임지는 사이를 뜻합니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친구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는 구절입니다.-중딩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행위라도 해라.는 말이 아닙니다. )

 

 오늘 말씀의 촛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셔야 합니다. 지금 본문의 장면의 본질을 조금 각색하여 만든다면 '예수님과 나' 정확하게 둘만 등장하는 것이며 내가 예수님을 어떠한 방식으로 십자가로 넘기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며 그러한 나를 예수님은 계속 친구, 제자, 교회(12), 함께가자 등등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에 보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나의 모습'으로 오늘의 에피소드가 끝을 맺죠. 

 

 이렇게 교회가 예수님을 못박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셔서 선택받은 자들을 골라 자기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죠. 그런데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욕하고 비판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욕하고 비판하는 위치에 잠시 서게 만든 장면이 바로 '베드로가 칼들고 설치는 장면'입니다. 재미있게도 마태복음은 베드로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 하나'라고 표현합니다. 즉,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인의 정체성을 가진 그 누구라도'의 의미가 필요했던 것이죠. 즉, 이 자는 바로 '나'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이 행위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했겠죠. 즉, '내가 예수님을 위해 그 무엇이라도 하리라'는 마음을 갖고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은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입니다. 이 말을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폭력을 쓰면 안된다. 그런 자는 그 폭력 그대로 돌려받는다.'로 가르치죠. 의미는 맞는데 촛점이 틀립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한 '칼'의 촛점은 '폭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구원을 위해 한 몫 담당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해 드리게 하기 위해서) 조금 더 단적으로 풀어서 말씀드리면 '구원을 위해 내가 노력하겠다고 하는 자는 그 노력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망한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쓴 이 칼은 앞에서 나온 예수님을 겁박한 '칼과 몽치'와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 두가지 '칼 행위'를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즉, 첫번째 칼은 예수님을 잡는 칼, 두번째 칼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한 칼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가지 칼은 다 똑 같은 칼이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 베드로를 내세우셨고 책망하신 것이죠. 그러면서 이 칼과 몽치가 가진 의미를 다시 한번 상기시킵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고 하시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말씀하시지만 그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인본주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바로 '강도'의 자리에 위치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같은 휼륭한 교인들에게 그들이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신앙을 빼앗은 것도, 스승을 지켜야겠다는 베드로의 마음을 빼앗은 것도 전부 다 그들의 방향성에서 보면 '가치를 강도질'한 것입니다. 평생 십일조를 바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가치를 전부 부인해 버리니(그 가치를 강도질하여 버리니) 억울해 하면서 변명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박해하게 되죠.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알아야 구원을 얻어 예수님의 친구(신부,지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극대화시켜 무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오늘 나온 에피소드입니다. 

 

 '열두 군단'에서 12라는 숫자는 교회, 천국을 의미합니다. 즉, 천상의 군대를 뜻하죠. 예수님께서 조금 유치하게 말씀하시면까지 우리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시는 장면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못하는 행위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은 다 성경에 쓰여져 있으며 그 성경을 이루려 함이 목적이라고 하죠. 즉, 복음의 섭리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말씀이 나오죠.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것이 정확히 우리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인본주의에서는 어떠한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든 교인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세요. 결국 전부 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인본주의 가치 획득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가족, 돈, 건강, 지위, 명예, 인기, 미래의인생, 과거의인생, 인간관계, 교회부흥 등등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인생에 1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인생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되는 것, 즉 꿈(인생)을 깨고 진짜 현실(천국복음)을 알게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시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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