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완료)

마27:1-10(22.03.16.수)

은혜바라기 2022. 3. 16. 08:5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죠. 그런데 이 자들이 바로 '나' 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선택된 자들에게만 말하는 책입니다. 유기된 자들에게 말해서 반성하고 뉘우쳐서 '스스로' 돌아 오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은 이 '스스로'라는 단어에 포커스를 마추어서 묵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가룟유다의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어가 '스스로'입니다. 한번 살펴보죠. 

 예수를 판 유다가  '. . . . "스스로" 뉘우쳐 . . .' 라고 되어있죠. 그 다음 문장에서는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라고 되어있죠. 이 두 장면에 삽입된 '스스로'라는 단어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인본주의에서는 이런 유다의 행위를 최고로 여기죠. 가룟유다는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뉘우쳤고 자신이 받은 재물도 스스로 다시 갖다 주었으며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으며 스스로 목숨까지 바쳐 죄 값을 치뤘죠. 이것은 인본주의 세상에서는 가장 최고의 선입니다. 

 교회의 수련회와 부흥회 때 스스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울고 불고 반성하며 죄의 행위를 끊고 변화하는 삶을 사는 것이 굉장히 선해 보이지만 이것은 복음의 방향성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이것은 교회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불교, 이슬람교 심지어 세상의 모든 초,중,고 학교 수련회와 소풍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영화 한편을 보고도 벌어지는 일이죠. 그리고 이렇게 변화된 사람을 보면서 사람들은 박수 치며 인정하죠.

 

 그러나 복음은 이런 행위가 소용없다는 것을 가룟 유다에 빗대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 장면 중간 중간에 "스스로" 라는 단어를 두번이나 강조해서 넣으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 '스스로'라는 단어가 이 에피소드에서 하나님께서 말하고 싶은 포커스입니다. '스스로'란 결국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인간 스스로 행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란 자기의 능력으로 자신의 죄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뜻하죠. 이것은 명백한 죄인의 속성입니다. 오늘은 매우 어렵지만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중요해서 다시 한번 예를 들어 설명드립니다.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교회에서 술, 담배를 하지 말라고 하니 마음에 찔려 술, 담배를 끊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해보죠. 이 자체가 완벽하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잔인하게 말씀드리면 그냥 죄인이 죄인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넣으셔서 '하나님과 상관 없는 행위'라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깊이 묵상을 하시려면 '성화'라는 단어를 묵상하셔야 합니다. 인본주의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성화'란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해서 점점 더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이것은 불교의 해탈과도 같은 방향성을 갖죠) 그러나 복음에서 말하는 성화란 '내가 절대 성화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오직 모든 소망을 예수님께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만 남기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인본주의에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가 되죠. 

 

 오늘 가룟유다의 행위를 잘 생각해보세요. 어떤 교인도, 어떤 목사도 가룟유다 보다 더 철저하게 반성하고, 뉘우치고,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개 무슨 잘못을 할 때 사과하는 정도로 끝을 내거나, 약간의 손실을 보상하는 정도,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약간 변화된 행동양식을 갖게 되는 정도에 그치죠. 하지만 가룟유다는 완벽한 뉘우침과 그가 받은 모든 이익을 전부 토해 놓고 그것도 모자라 '사형'이라는 벌을 스스로에게 내려서 그 값까지 치루어 내죠. 교회에서 어떤 자가 이 정도의 뉘우침과 변화를 보인다면 그를 대부분 칭송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사실 가룟유다 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룟유다의 행위에 전부 '스스로'라는 단어를 넣어서 강조하시면서 이것이 무의미, 무가치하다는 것을 드러내시죠. 오늘 이 묵상을 통해 이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은 30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는다.' 이 말씀에서 은30은 예수님의 목숨 값(가치)를 가리키고 토기장이의 밭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은 천국을 벗어나서 인본주의 삶(타 지역)을 잠깐 살기 때문에 나그네로 표현되죠. 정리하면, 선택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목숨 값으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살게 된다.'의 진짜 목적이 '묘지 삼는다.'로 표현되있죠? 즉,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복음이 보이면 어렵지만 재미있죠? 이 말씀을 완벽하게 풀어준 요절이 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결론은 이렇습니다. 선택받은 자는 유다와 같이 스스로 죄를 책임지는 자가 아닙니다. 그 죄를 예수님께 묻어야 합니다. 그 죄란 나의 옛자아 전부를 뜻합니다. 인본주의에서 말하는 죄들은 진짜 죄를 알려주기 위한 일종의 상징(증상)입니다. '살인 거짓말, 강간, 도둑질'이 참죄가 아니라 '살인, 거짓말, 강간, 도둑질, 욕심을 끊고 새사람이 되어 남을 돕고 희생하며 살자(스스로)'에만 묶이는 것이 바로 참죄입니다. (이것을 자기가치로 삼기 때문이죠)

 복음으로 이것을 듣는 사람은 '형제를 미워만 해도 살인'이라는 말씀처럼 내가  '살인, 거짓말, 강간, 도둑질'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이 도피성임을 알게 되어 예수님만을 소망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으로 나의 옛자아의 묘지를 삼아야 합니다. (( 아래의 이중괄호에 묵상 속의 묵상을 조금 더 첨가합니다. ))

 (( 구약의 도피성 아시죠? 사람을 죽여도 도피성에 들어가면 처벌하지 못하게 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와 예수님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구약의 도피성의 조건은 '고의적이지 않은 살인자에 국한한다.' 라고 되어 있잖아요??" 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 말도 복음으로 풀어보면, 우리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결국 우리의 고의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굉장히 은혜되죠? 더 크게 보면, 천지창조를 하신 이유 자체가 우리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죄는 결국 어떤 것을 설명하는 상징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섭리의 시간동안의 모든 죄는 전부 고의적이지 않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는 도피성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또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확 달라져요. 그럼 막 죄 짓고 살자! 이것이 모두 다 하나님 탓 아닌가! 이런식이 되죠. 그래서 복음은 설득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성령께서 선택된 자만을 올바른 방향성으로 인도해서 예수님께 넣으시는 것이죠.  이것이 복음의 결론입니다. 목적지가 예수께 있는가? 아닌가? 그리고 이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계시록의 심판은 죽은 이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속에서 복음을 아는 자와 끝까지 모르는 자로 구분하겠다는 것이 바로 계시록의 심판이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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