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오늘 등장한 인물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관여된 무리 중 마지막 인물들입니다. 인본주의 종교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희롱하는 자들에게 '이런 나쁜 놈들' 이라고 말하면서 비판하죠. 그 비판 속에는 '나는 그들과 같지 않다'라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주님의 피와 살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에 있는 자들은 오히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라고 고백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게 되어 주님의 지체가 되는 것이죠.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의미는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임'을 고백하는 동시에 '내가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관여된 무리들은 1.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와 저주하고 도망친 베드로 2. 유대인을 대표하는 지도자들 3. 이방인을 대표하는 로마의 대표 총독 빌라도 4. 그리고 오늘 직접적 가해자를 대표하는, 예수님을 희롱하고 십자가에 매단 인물들입니다. 이 모든 말을 종합하면 모든 인류가 전부 다 예수를 박해하는데 관여 했다는 말입니다.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특별히 유대인을 위해 쓰여진 복음서입니다. 참고로 마가복음은 로마인(적-원수), 누가복음은 헬라인(이방인-제 삼자), 요한복음은 모든 죄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죠. 그래서 마태복음의 이 장면은 다른 복음서보다 더 뚜렷하게 구약의 제사형식을 비유삼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죽인 이 예수님이 너희가 몇 천년동안 행한 제사의 제물, 즉 너희 죄를 위해 희생당한 어린양의 실체이며 대제사장이시다.' 란 말입니다.
또한 이 장면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군병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희롱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죄된 행동을 이용하여 오히려 복음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풀어가죠. ( 같은 행동과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선택된 자는 복음으로 보게 되고 유기된 자들은 인본주의(땅.지) 시각에 갇히게(옥)되죠. 즉, 말씀을 대하는 시각 자체가 백보좌 최종 심판입니다. 늘 이야기했지만 계시록은 장래의 일을 보여주는 것이 실체가 아닙니다. 계시록의 실체는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
'그의 옷을 벗기고' 는 구약에서 제물로 쓰인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완벽하게 박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홍포를 입히며'는 당시 대제사장이 제사 때 우슬초에 짐승의 피를 묻혀서 계속 자기 자신을 치면서 피를 묻히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나의 죄를 덮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박해를 통해 복음을 읽어내야 합니다.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에서 가시 면류관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한 최종 승리자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에서 갈대는 약하디 약한 우리(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오른쪽이란 천국을 의미하죠. 즉, 예수님께서 약하디 약한 갈대인 교회를 오른손으로 잡고 천국 통치를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무릎끓고. . . 유대인의 왕이여~~' 는 매우 중요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자들의 이 비꼬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은 모든 이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게 되고 그 분이 왕이 되실 것을 정확히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평안할찌여다' 라고 비꼬죠. 이것은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 될 것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참으로 소름돋지 않습니까? 하찮은 군병들은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모독하고 핍박하려고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이 전부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대로 설명하는 도구가 됩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들 중 한명이 예수님의 죽음 직후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복음의 눈으로 보면 '성경, 역사, 우주, 자연, 인생' 전부가 예수님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죠. 이것을 '눈을 뜬다. 혹은 깨어 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을 단지 '종교적인 신'으로 보고 그 분을 통해 소원성취하려는 '나' 중심의 인본주의 종교인이 지금 교회를 다니는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조심하셔야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나'의 소원성취를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 '남' 혹은 '가족, 교회, 나라 등의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을 '가장 올바른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결국 '확장된 나'입니다. 이렇게 '확장된 나'를 '인본주의'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이 부분에서 조금 더 본질을 들여 다 보아야 합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항복하여 두 손을 들고 입을 막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잘 이해하셔야합니다. '잘못된 기도를 올바른 기도로 바꾸자'가 아닙니다. '누구나 잘못된 기도를 하지만 복음을 엿본 자들은 결국엔 입을 닫게 된다'로 이해하시는 것이 올바른 방향입니다. 이것을 '그래! 복음을 아는 자가 되려면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하는구나!'로 알아 듣게 되면 안됩니다. 매우 매우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은 사람의 이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올바른 방향성은,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는 것에 초점을 두지 마시고 두 눈을 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며 그 분을 묵상하고 나의 삶, 인류의 역사, 성경의 스토리에서 그 분의 스토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모든 염려는)을 다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 베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
중 괄호로 묵상 속의 묵상을 조금 더 하죠. [ 이상하게, 왜 오늘 묵상이 '기도'로 바뀌는 지를 모르겠네요 ㅎ ㅎ ]
((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말씀을 잘 들어 보면 '거 바! 구할 것을 아뢰라고 하잖아'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말씀의 본질을 보는 것은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만약 이같이 해석한다면 그것은 다른 종교와 똑 같은 것입니다. 무당들도 똑 같이 합니다. 저 말씀에서 하나님을 빼고 '무당신'을 넣어보세요. '염려하지말고 기도하고 간구하면서(빌면서) 너가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무당신에게 구해바~~' 이것이 바로 무당집에서 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오직 복음을 아는자, 즉, 선택된 자들에게만 알아 듣도록 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자는 그 자들이 구할 것이 딱 한개 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죠.(혹은 복음 혹은 성령님) 이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하죠. 감사하다는 것은 이미 받은 사람이 하는 말이죠. 즉, 선택된 자들은 이미 태초에 예정된 자들이므로 이미 복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조금 의역해서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너희가 인본주의에서 살게 되면 당연히 염려라는 것이 오겠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다 짊어지셨느니라. 너희들은 너희의 구할 것 즉, 복음만을 구하고,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그것 조차 이미 태초에 너희에게 주어지기로 예정된 것이므로 오직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받기만 하면 된단다.' 입니다. 어떠세요? 무당집 해석과 전혀 다르죠? 왜 같은 말씀으로 이렇게 오른쪽과 왼쪽의 길로 나뉠까요? 이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
끝.
P.S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