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19:21-41(22.10.05.수)

은혜바라기 2022. 10. 5. 07:46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


 사도행전을 읽을 때 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행로를 구분하여 바울의 여행길에 포커스를 두다 보면 정작 중요한 성령님의 복음 이야기를 놓치게 됩니다. 바울이 어떤 길을 통해 몇 번의 전도여행을 하는지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죠. 

 그래서 21-22절을 보면서, ‘아~ 바울이 몇 차 전도여행에서 이곳과 저곳을 이렇게 누구와 누구와 다녔구나~~’로 보시지 마시고 ‘아~~ 성령께서 복음의 씨앗을 이곳저곳에 이런 식으로 뿌리시면서 일하셨구나~~’로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복음사역을 하시게 되면 틀림없이 23절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적지 않은 소동’입니다. 

 ‘적지 않은 소동’의 내용을 요약하면, 우상이 많은 나라들에 복음이 전파되자 그 우상을 통해 돈을 버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수입감소로 인해 소동을 일으킨다는 내용입니다. 

 성령께서 오늘의 에피소드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소동’이라는 표현입니다. 

 오늘의 에피소드의 초점은 복음으로 인한 박해는 사실 박해가 아니라 소동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복음이 전파되면 인본주의 세상은 그것으로 인해서 소동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힘도 없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은 이미 사탄의 머리를 밟으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오직 그분의 뒤꿈치를 무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죠.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래서 성령께서는 복음으로 인한 박해를 ‘소동’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즉, 박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님’을 가르쳐주시는 것이죠. 이런 관점으로 오늘의 에피소드를 빠르게 다시 해석을 해볼게요. 

 복음이 전파되자 우상을 통해 돈을 버는 많은 사람들이 박해(소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한 자체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진짜 속 마음은 바로 ‘자신의 이익’때문이라는 것이죠. 

 이후 바울은 그 소동에 관여하려고 그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데 뭇사람들이 그것을 막죠. 결국 바울은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즉, 성령께서는 소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이 소동의 무가치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관여하여 무엇인가를 가르칠 수준조차도 못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32절과 같은 문장이 성경에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죠. 즉, 소동은 났는데 그 진짜 이유조차 모르고 소동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 소동의 실체는 그냥 그 가치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이후 알렉산더라는 유대인이 잠시 들어가 변명하려고 하죠. 그러나 그 변명은 통하지도 않고 오히려 막말만 듣게 되죠. 이 알렉산더라는 자는 성령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교인의 역할입니다. 성령께서 ‘상관하지마’라고 했는데 ‘내가 가서 어떻게 해볼게~~(행위)’를 고집한 교인의 역할입니다. 

 마지막으로 40절을 보면, 서기관이 나와서 이 모든 소동을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이라고 선언하죠. 즉, 이 소동은 이유도, 까닭도 없는 무가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41절을 보면,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라고 끝맺음을 맺죠. 결국 그 소동은 없어지죠. 

 이제 성령께서 오늘의 에피소드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아시겠죠? 복음이 이 땅에 떨어지면 인본주의는 소동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손해 때문이고 이러한 모든 소동에 선택받은 자들은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복음을 전했다면 그들이 소동을 일으키든 말든 상관하지 않다도 좋다는 말이죠. (결국 오늘도 복음의 중요 속성인 ‘분리’의 한 측면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점을 잡으셨다면 다시 한번 본문을 읽으시면서 묵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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