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오늘 말씀은 그 속에 흐르는 바울의 갈등을 읽어 내는 것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우리라고 표현된 무리는 배를 타고 가고 바울은 혼자 걸어가죠.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이후 이 무리는 앗소에서 바울을 다시 만나서 배에 태우고 함께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여행 방식은 바울의 결정 때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빨리 가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걸어가야 하니 따로 가자고 결정하고 또 다시 급하니까 같이 배를 타고 가야 한다고 결정하죠.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 에베소를 그냥 지나쳐서 배를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밀레도에 도착해서 갑자기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서 교회 장로들을 데려오라고 하죠. 오히려 더 시간이 지체되고 있죠.
왜 이렇게 바울의 행적이 이상하게 보일까요? 뭔가 갈등하고 있다는 것이 보이십니까? 그 이유는 다음번 묵상할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예루살렘으로 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릴 것이다.’라는 계시를 하십니다. 이 계시를 받은 바울의 심리상태는 주저함과 갈등입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바울은 13절에서 배를 타지 않고 혼자 걸어서 갑니다. 아마도 겁을 먹은 것이겠죠. 그러나 결국 성령께서 보낸 ‘우리’로 인하여 바울을 태우고 떠나죠. 결국 바울은 16절에서 보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고’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가게 됩니다. 즉, 바울은 갈등을 하다가 성령님께서 보낸 여러 환경에 의해 마음을 굳히고 빠른 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죠. 바울도 결국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고를 가진 겁 많고 갈등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렇게 급히 서둘러야 하는 상황에서 바울은 또 이상한 짓을 하죠. 이후 17절에서 보면, 바울은 급하게 가기 위해서 그냥 통과한 에베소의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기다리면서 까지 데려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복음전파 행위에 대한 변명을 시작합니다.
바울의 이 긴 설교 내용을 보면, 복음에 대한 설명도 들어 있지만 때로는 자신을 변명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내용도 같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이 내용을 성경에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통하여 복음을 가르치시는 것이죠.
19-20절 보면, 바울은 ‘나는 겸손했고 눈물을 많이 흘렸고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고 유익한 것은 다 여러분에게 전했다’ 어떻습니까? 이것이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겸손하고, 참 눈물을 흘리시면서 모든 시험을 참고 모든 유익한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왜 이것을 성경에 기록하셨을까요? 이것은 바울의 착각을 통해 예수님의 열심을 조명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에도 크리스천들이 복음사역을 할 때 이런 방식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은혜에 떠밀려 사는 삶을 사는 것 뿐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가운데 튀어나오는 모든 행위와 말들은 모두 '쓰레기'일뿐입니다. 그 쓰레기를 성령께서 재활용해서 '쓰임'으로 바꾸어서 복음의 도구로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21절에서도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을 끼워넣죠. 즉, 회개와 믿음에 대한 설교가 아니라 바울은 그것을 내가 잘 증언하고 다녔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명을 자랑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도 성령께서는 신기하게도 그 '자랑'을 '쓰임'으로 바꾸어서 복음을 가르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죠. (이 메카니즘은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지 못한 자들은 절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쓸모없는 인생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이 얼마나 쓸모가 없는지를 알아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치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가치는 인생의 무가치함을 알게 될 때 가장 큰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큰 가치의 이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역설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마다 묵상하세요.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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