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23:26-35(22.10.28.금)

은혜바라기 2022. 10. 28. 08:29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성령께서는 오늘의 말씀에서 복음의 어떤 면을 설명하고 싶은 것일까요? 성경은 역사적 관점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든 단어와 문장은 오직 복음을 설명하죠. 우리가 어리석어서, 우리가 인본주의에 묶여 있어서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오늘은 복음의 전체적인 배경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래서 조금 긴 서론으로 오늘의 묵상을 시작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의 하나님께서는 같은 밥상에서 같이 밥을 먹을 ‘사랑하는 지체’를 창조하시길 원하셨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은 그것이  즉시 계획 되었다는 뜻이고 그것이 계획이 되었다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 혹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창조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그분이 창조한 '시간'이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드립니다. 창조는 언제 시작이 되었을까요? 복음의 시간으로 본 '창조의 시점’은 도대체 언제일까요? 

 대부분 창세기 1장을 이야기하시겠죠. 그런데 아닙니다. 창조의 시점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나의 시간’에 비추어서 말한다면,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었을 때가 바로 창조의 시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때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죠. 혹은 거듭남, 즉 다시 창조됨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늘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신을 상상하면서 ‘비나이다. 비나이다~~나의 소원을 비나이다~~’라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불교, 이슬람, 힌두교와 같이 인간이 만든 인본주의 종교일 뿐입니다. 물론 선택받은 자들도 모두 표면적으로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묶여 있지만 그들은 종교가 아닌 ‘생명’의 길을 걷게 되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완성이 창조의 실체라면 과연 창세기 1장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과정을 설명하는 부록(표지판, 그림자)입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창조는 실체가 아닌 그림자였고, 진짜 창조는 바로 예수님이 그분의 십자가를 완성하여 이루어낸 '천국'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출발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면 많은 것이 바뀌죠. 

 그래서 이 세상은 왜 예수님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는 표지판의 시작이 창세기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성이 진짜 창조의 실체이지만 그 실체를 설명하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1장이며, 혹은 인류의 역사이며, 혹은 나의 삶과 인생이며 혹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입니다. 모두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 간단치 않죠? 성령께서는 이 비밀을 선택된 자들에게 알려주셔서 그들을 인본주의라는 죄에서 분리시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신 것이죠. 

 이렇게 성령께서 선택된 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면 그들은 복음을 알게되어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하나씩 알게 됩니다. 즉, 실체를 알게 되는 것이죠. (눈을 떴기 때문에) 이렇게 실체를 알게 된 것을 '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각으로 오늘의 본문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표지판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복음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바울이 천국시민으로, 즉 선택받은 백성으로 창조된 사람이라는 ‘천국 시민 신분’에 대한 상징적 배경 설명입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인 천부장은 그를 매우 강력하게 보호하죠. 그래서 천부장은 바로 하나님의 표지판이 됩니다. 31절 보면, 그가 보병으로 바울을 보호하고, 기병으로 바울을 보호하죠. 성령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계속 보호를 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총독 벨릭스에게까지 무사히 바울을 호송하게 되죠. 복음의 여정의 종착지까지 성령의 인도하심 혹은 견인하심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당연히 해당이 됩니다. 우리의 복음의 종착지까지 성령께서 항상 견인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표지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선택받은 자들의 대표가 되시죠. 그래서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나나 모두 다 같은 한 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한 몸 원리를 벗어나면 이해할 수가 없게 되죠. 

 그래서 29절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완벽하게 예수님에 대한 표현이죠. 또 30절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라는 표현도 예수님이 받으신 박해를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박해받은 것은 매우 여러가지 의미가 존재합니다. 첫째. 우리의 죄로 인해서 대신 박해를 받은 것이기도 하고 둘째 우리가 예수님을 박해하여 스스로 박해당하신 것이기도 하고 셋째 우리의 비참함을 보여주시는 것이기도 하며 넷째 이 세상과 복음은 절대 같이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죠. 


 마지막으로 총독 앞으로 불려간 바울의 장면을 묘사한 34절을 보면,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라는 표현도 나오죠. 길리기아는 로마 황제로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 시민으로 인정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라는 뜻은 ‘아~~ 그래~~ 넌 확실하게 로마 시민이겠구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복음으로 풀면,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아~~ 그래~~ 네가 확실하게 예수님의 품에 있는 자라면 넌 확실히 천국 시민이겠구나~~’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잘 읽어 보세요. 복음의 눈을 뜨지 않고 이 에피소드를 읽게 되면 여기서 절대 나와 예수님 그리고 복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한 사람들을 찾아보세요.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불쌍히 여김받는 사람의 형태로 표현이 된 자들입니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사업에 실패하거나 건강을 잃어버린 노숙자의 형태로 인식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가치를 잃어버린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입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 마다 묵상하세요.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그러나 이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도 행위로 파악하여 책임감에 어깨가 짖 눌리신 분들이 많죠. 이 말은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 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 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 버립니다. 

 주위에 이런 분들이 눈에 들어 온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반대로 마음이 부유한 자들을 설득하려 하지 마세요. 마음이 부유한 자들이란 사회에서, 교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쌓아가는 자들입니다.(물론 그들 중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난함을 인식하는 자들도 있겠죠) 그들에게 그 가치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가치만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예수님의 가치가 충돌하죠.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님을 살인(부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여러분을 박해(오해)하죠.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살벌하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즉, 가족입니다. 사랑하기에 때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 날을 생각해 보세요^^

 주말과 공휴일은 묵상이 없습니다. 친구, 가족과 재미있게 잘 보내시고 다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도록 기도하세요. 재미있게도 눈을 뜬 자들은 어떠한 이단목사의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으로 가공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들의 행위는 본 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잘 지켜라 ” 어떠한 기독교 이단이라도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통로로 하나님은 사용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정통교회 목사라도 이단적 발언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죠. (저의 묵상을 포함해서 모든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가리키는 목표인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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