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완료)

행23:6-10(22.10.26.수)

은혜바라기 2022. 10. 26. 08:13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오늘도 계속되는 바울의 변명의 시간입니다. 방향성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바울은 좋은 놈, 유대인은 나쁜 놈 이런 관점이 가장 위험합니다. 바울도 나(죄인), 유대인도 나(죄인)입니다. 이 두 부류를 통해 오직 예수님만 소망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묵상 첫 구절인 6절을 보면, 바울은 지금 꾀를 부리고 있습니다. 즉,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라는 두 부류가 같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부활’이라는 파문을 던진 것입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을 안 믿는 유대인들이었고 바리새인은 부활을 믿는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두개인, 바리새인 이 세 부류 모두 ‘이상한 놈들’이죠. 

 그런데 이 에피소들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7절을 보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부활’의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됩니다. 또한 9절에 보면, 이 문제로 바리새인은 바울의 편을 들게 됩니다.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라고까지 하죠. 바로 직전에 죽이려던 사람을 이제는 악한 것이 없는, 심지어 천사의 편일지도 모른다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눈에 조금 보이시죠?

 바로 ‘신학의 무게 가치’입니다. 사도행전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깊어집니다. 잘 따라오세요. 

 오늘 에피소드에서 바울은 자신의 변명에 무게를 싣기 위해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관계를 이용하여 신학적 난제를 던져 버린 것입니다. 다분히 의도한 것이죠. 그런데 성령께서는 이것을 그냥 방치하셨죠. 그 이유는 그 결과물이 복음을 설명하기 좋은 재료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대에서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등 수많은 기독교 종파가 나누어집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신학적 이견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역사가 흘러갈수록 이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죠. 많은 기독교,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신학적 무게'를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에피소드에서 성령께서는 그런 신학적 무게를 ‘블랙 코미디’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신학’ 즉, ‘신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말은 복음을 아시는 분들이라면 얼마나 황당한 말인지 알게 됩니다. 사람이 신을 연구하여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복음적으로 절대 말이 안 됩니다. 복음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뿐이시고 오직 그분이 가르쳐주실 때에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자칫 ‘신비주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알려주시는 유일한 통로는 ‘성경’이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쳐주는 도구로 ‘신학’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복잡해졌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인본주의 전체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고, 즉 하나님과 분리된 이후 저주받은 이 땅, 즉 인본주의 세상으로 선택된 자들을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본주의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복음을 설명하시죠. 그래서 인본주의 그 자체가 죄라는 것과 그 안에서는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곧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선택된 자들에게 국한합니다. 유기된 자들은 죽을 때까지 오직 인본주의 꼭대기, 즉 ‘잘살기’에만 매몰되죠.

 이 시스템 속에 ‘신학’이라는 부분도 함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도이지만 그 제도에 매몰되면 안되는 것이죠. 즉, 신학을 통해 성경을 배우지만 결국 신학 그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러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을 통해 혹은 그 신학을 배운 지도자를 통해 성경을 배우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께서는 바울을 꾀돌이 악당으로 만들어서 신학적 화두를 던진 것이고 그 신학적 화두로 인해 친구가 원수가 되고 원수가 친구가 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허구의 가치에 매몰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 교회는 전부 이 놀음에 놀아나고 있죠.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복음에 눈을 뜨신 분들이라면, 본질을 꽤뚫어 보셔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신학, 신념, 복음의 지식 등등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교회에 잘 다니고 충성하면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던 내가 복음을 알게 되어 그런 것들이 가치적으로는 ‘0’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치죠. 그런데 이렇게 복음의 참 본질을 조금씩 알게 될 때 위험한 것이 있습니다. 즉, 깨달아 알게 된 복음의 지식에 다시 매몰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조명하신 깨달음은 그 순간 우리의 방향성을 바꿔주는 것뿐입니다. 즉, 나의 눈이 오직 예수님께 향하도록 하신 것이죠. 그런데 잘못하면 우리의 방향성을 바꿔준 그 지식에 매몰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우리가 ‘교회에 잘 다니고 가르쳐주는 대로 충성하면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똑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깨어있으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 말은 성령께서 선택된 자들을 늘 깨울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잔꾀를 낸 바울은 결국 10절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 질까하여’ 로마인들에게 이끌려 영내로 도망하죠. 성령께서는 바울의 비겁한 후퇴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다시 바울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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