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장1절을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라고 되어 있죠. 그래서 전도서는 솔로몬이 지은 책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성경에 기록이 된 순간 이 1절에 나온 ‘예루살렘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솔로몬에 대하여 관심이 1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공인 책이죠. )
전도서 1장2절을 보면,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절이 전도서의 전체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헛되다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전도서 1장3절을 보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수고, 공로, 노력, 업적이 전부 헛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창조와 멸망이 한 세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복음을 다 설명하면, 즉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복음을 알아들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 이 세상은 멸망하게 됩니다. 도구가 그 역할을 다하면 사라져야 하는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설명하는 본질인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 포장지에만 매달려 있으면 그것을 ‘헛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도서는 매우 쉬운 책이죠. 복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인간의 관점(유익, 즐거움)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이것을 유념하면서 전도서 4장을 살펴 보죠.
1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라고 나오죠. 해는 빛을 상징하고 빛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복음의 주인공이죠. 즉, 복음을 설명하는 이 세상에서 인본주의 세상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선택된 자들의 삶을 ‘학대(박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선택받은 자, 곧 구원받은 자들은 이미 태초에 정해져 있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하여 옛 자아로 살면서 인본주의 학대(박해)를 받게 되죠. 그들에게는 어떠한 위로도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나중에 이 위로자가 예수님이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자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은, 이미 태초에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 땅의 삶이 그들의 구원을 좌지우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살아 있는 자보다 죽은 자들이 더 복되다고 나오는 것이고 심지어 3절을 보면, 태어나지도 아니한 자가 더 복되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땅에 묶여 있는, 즉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유기된 자들은 오직 이 땅의 삶이 전부죠.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서 오래동안 잘 살는 것을 복되다고 믿게 되죠. 완전히 이 두 부류는 반대의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 전도자는 계속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인생들의 헛됨을 이야기합니다. 4절을 보면, 사람의 모든 수고와 재주도 결국 헛되다고 나오죠. 이런 인본주의에 묶여 있는 자들을 5절에서 ‘우매자’라고 정의합니다. 그들의 모든 공로는 결국 자기의 몸만 축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우매한 자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두 손에 가득 수고하여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으로 평안을 잡는 것이 낫다고 나오죠. 이때 바람은 헛된 것을 의미하고 평안은 샬롬, 즉 평강의 왕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일단 다시 한 번 방향성을 잡고 가겠습니다. 복음은 해석의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알게 되어 눈을 떴는가? 그렇지 못한가? 가 중요합니다. 복음은 오직 성령께서 조명하여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 조명이란 어두운 곳에서 조명을 켰을 때 그 앞에 있는 진리를 보게 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은 인간이 잠을 잘 때 꿈을 꾸게 하셨죠.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은 그것이 진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면 그 꿈은 모든 것이 허상, 즉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의 세상이라는 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이 바로 ‘꿈’입니다. 참 세상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영적인 세상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꿈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이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꿈 속에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를 알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각몽’이라고 하죠. 이 자각몽의 상태가 되면 그 꿈 속에서 완벽하게 자유하게 됩니다. 참 신비한 경험을 하죠. 그런데 인생 속에서도 복음을 알게 되어 눈을 뜨면 이와 똑같아집니다. 그때부터는 우리는 ‘전도자’가 됩니다. 즉, 인생의 모든 것이 결국 ‘헛된 것’임을 알게 되죠. 그 때부터 참실체를 찾게 되죠.
그러나 ‘인생이 헛된 것’이라는 것만 알게 되면 그것은 그냥 철학, 염세적 이념과 같은 이상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선택된 자들은 이 ‘헛된 것’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되죠. 이 정도 방향성을 가지고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 보죠.
8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는데 수고는 끝이 없다고 나옵니다. 즉, 수고를 할 대상 조차도 없는 의미없는 수고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본인의 눈이 부요를 족하게, 즉 재물을 탐내지도 아니하면서 그냥 수고만 한다고 하죠. 즉, 이 세상의 수고는 의미도 없고, 결론도 없는 수고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 부터는 조금 다른 방향성의 말씀이 나옵니다. 9절-12절까지 보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작은 에피소드가 계속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나와 예수님 혹은 나의 옛 자아와 거듭난 나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그 본질까지 설명하면 너무 깊고 길므로 생략하고 간단하게 정리하는 식으로 말씀드릴께요.
선택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내동댕이쳐지면, 그때 우리는 옛 자아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혼자 사는 삶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과 공간적 사고에서 혼자일 뿐이며, 실제 영적으로는 선택받은 자는 늘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면 그 때부터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 되죠.
그런데 나와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은 나의 옛 자아와 나의 거듭난 자아가 함께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묶여서 설명하면, 나의 옛 자아, 나의 거듭난 자아 그리고 예수님 이렇게 3의 관계로도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12절 하반절을 보면,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데 9절-12절을 보면, ‘하나가 넘어지면 하나가 붙든다’ 라는 표현이 계속 반복하죠. 즉, 나의 옛 자아는 늘 인본주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옛 자아를 보면서, ‘나는 정말 안되는 구나~~ 나는 할 수가 없구나~~ 나는 정말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나는 정말 예수님만 소망해야겠구나~~’ 의 방향성을 가지게 되어 오직 복음의 길에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옛 자아도 필요하고 나의 거듭난 자아도 필요하죠. 그런데 나는 예수님과 한몸이죠. 이 묘한 관계는 이 세상의 논리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복음의 눈을 뜨면 그 방향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후 13절을 보면,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늙고 둔하여 경고를 받을 줄 모르는 왕은 나의 옛 자아(혹은 인본주의)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인본주의에서 가치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절을 보면, 이 젊은이에 대하여 계속 설명을 하죠. ‘그는 자기의 나라에게 가난하게 태어났을지라도’라고 나오죠. 완벽하게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나사렛’이라는 의미는 지금 현대로 말하면, ‘달동네’ 라는 뜻입니다. 즉, 가난한 동네의 대명사로 ‘나사렛’이라고 불렀죠.
그러데 ‘그가 감옥에서 나와’라고 되어 있죠. 여기서 ‘감옥’은 인본주의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인본주의에서 분리되어 진정한 ‘왕’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15절 부터는 결론입니다. ‘해 아래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다음 자리에 있다가’라고 되어 있죠. ‘왕의 다음 자리’라는 뜻은 예수님의 곁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후 15절 하반절을 보면, ‘왕을 대신하여 일어난 젊은이(예수님)와 함께 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과 교회가 한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16절, ‘그의 치리를 받는 사람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라는 뜻은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가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후에 오는 사람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죠. 즉,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기뻐하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헛된 것이라고 나오죠. 이 뜻은 조금 어렵습니다.
이 뜻의 요지를 조금 쉽게 말씀드리면, ‘기독교’라는 예수님을 따르는 종교가 아무리 커지고 양적으로 많아지고 무수한 사람들이 쫓는다 해도 전부 헛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인간 쪽에서 아무리 열심을 내어 수고를 내어 따른다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에게 찾아와 구원하는 형태라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구절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더 직설적으로 해석하면, ‘교회(지상교회)’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이 ‘헛됨’의 구조에서 벗어나 계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도 결국은 헛된 꿈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무용론을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교회는 복음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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