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일부완료)

요청(전도서5장)

은혜바라기 2023. 3. 24. 17:40

 1절,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네 발을 삼가라는 말은 ‘행위’를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것이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는 말은 ‘복음과 종교’를 비교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 ‘종교’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종교는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 만들어낸 인본주의 산물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인본주의 산물이죠. 

 인간은 이런 종교성을 절대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로 지음받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인간의 기준으로 살게 되었죠.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인본주의를 ‘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본주의를 살면서 저절로 드러나는 살인, 간음, 거짓말, 탐욕 등등은 ‘죄’가 아니라 ‘죄의 증상’입니다. 

 이렇게 죄인이 된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항상 소통을 하도록 지어진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절대 치유될 수 없는 ‘절대 고독’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넓은 집, 더 많은 인간 관계, 더 좋은 가족 관계 등등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절대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은 본능입니다. 이런 행위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것으로도 절대로 이 ‘절대 고독’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TV에 보면, 고독사하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모든 인간은 100% 다 고독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절대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려고 만든 ‘종교’는 결국 죄인들의 또 다른 발버둥일 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이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종교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기독교를 만드셨다면 절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등으로 나누어 질 수가 없죠. 또한 장로교도 합동, 고신 등등의 여러 파로 다시 나누어 질 수가 없죠. 그냥 다 인간이 만든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교를 도구로 삼아 선택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무용론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는 꼭 필요하죠. 하지만 1만명이 다니는 정통 장로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단 1명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이단 종파(성경을 읽는)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 1절에 나오는, ‘제물 드리는 것’은 ‘종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1절 하반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라고 합니다. 즉, 종교는 그것을 통해 복음을 듣지 못하면 그냥 ‘악’일 뿐입니다. 반대로 1절 중반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종교보다는 말씀을 듣는 것’을 권하죠. 그런데 이상하죠? 교회에 가면 항상 말씀이 흘러 넘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말씀은 저절로 귀에 들어오는데 왜 ‘말씀을 들어라’고 굳이 강조하실까요? 집중해서 들으라는 말씀인가? 

 아닙니다.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본질인 ‘복음’을 들으라는 것이죠.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오직 선택된 자들에게만 이 복음을 들려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나가가서 설명드리면, ‘복음’이 들리는 자는 구원받은 자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죠.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는 말씀이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서론을 조금 길게 가져가는 것은 성경은 복음의 방향성을 가지고 읽지 않으면 그냥 ‘독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안경을 끼시고 따라오세요. 이제부터는 조금 빠르게 해석해 나아가겠습니다.

 2절.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는 것은 신약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할찌어다’와 같은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지요. 그래서 교회에서 말(행위)을 하는 자는 오직 예수님뿐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사람이 말(행위)을 하는 것은 모두 ‘종교’일뿐입니다. 

 3절,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긴다고 하죠. 여기서 걱정은 인본주의 걱정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돈 걱정을 하게 되면 돈 벌 궁리를 하게 되죠. 그 돈 벌 궁리가 사업의 비젼(꿈)을 만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가르치지만 결국 이것은 자녀를 인본주의 미래에 묶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아~~ 넌 꿈을 가지지 말고 그냥 날나리로 살아라~~’라고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도 아니겠죠. 

 결국 우리는 자녀를 죄인의 삶으로 밀어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제가 가장 개인적으로 갈등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 분도 태초에 선택한 그분의 자녀들을 이 땅 인본주의 삶으로 보내어 죄인의 삶을 살게 하시면서 그 안에서 결국 복음을 알아듣게 하여 구원을 이루어내시죠. 선택된 자들의 부모 역활과 똑같죠?

 결국 자녀에게 공부해라, 몸 건강해라, 행복해라. 꿈을 가져라, 내가 그것 도울게~~ 이 모든 것은 자녀를 무저갱 지옥에 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복음도 가르쳐야 합니다. 이 역설적인 가르침이 결국 통할 수 있는 이유는 내 자녀를 진짜 가르치는 것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자녀도 결국 갈등과 번민 속에 그 부모가 이야기하던 복음을 알게 되죠. (물론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가정하에서 입니다. ) 그래서 저도 제 자식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서 너가 원하는 꿈을 찾아가라, ~~~ 그래서 그 꿈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오직 예수님만 소망해라~~’ 이렇게 가르치는데 이렇게 가르치면 그 아이는 ‘어리둥절’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나이가 들면서, 결국 조금씩 그것을 고민하고 알아듣고 이제는 질문까지 하죠. 

 심지어 구약에서는 자녀를 낳으면 ‘부정하다’라는 율법에 걸리게 됩니다. 웃기죠? 이 세상에서는 자녀를 낳으면 축복받은 것이 당연한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준은 ‘부정하다’ 즉 저주받은 상태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7일 동안 부정한 상태가 되죠. 더 웃긴 것은 여자 아이를 낳으면 그 두 배인 14일이 부정한 상태가 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낳은 여자 아기는 나중에 다시 아기를 낳는 여자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본주의 관점으로는 절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

 4절부터 ‘서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서원은 나와 하나님의 계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것을 다 지키면 천국, 못 지키면 지옥 이라는 계약을 맺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절 상반부를 보면, ‘그것을 빨리 지켜라’ 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절대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너희는 서원을 하지 말라고 하시죠. 

 그런데 서원하지 않는 인간은 한명도 없습니다. 즉, ‘내가 거짓말 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마음에 품기만 해도 이것은 서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빨리 온전히 그것을 지켜 보아라~~’라고 그 답을 원하시는 것이죠. 답은 다 아시듯 ‘우리는 결코 그것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그때 ‘ 아~~ 실수~~’ 라고 하지도 말라~~ 넌 심판 받을 것이다‘ 라고 6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 받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서원을 대신 온전히 행하시고 갚으신 분이 계시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품에 들어가서 우리도 ’서원을 잘 갚은 자‘가 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이후 7절-17절까지는 우리가 인본주의 삶을 살 때 나오는 현상들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것이고 그 현상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잘 읽어 보시면, 우리가 동화책에서 읽었던 결론과 다르죠? 권선징악이라는 결말이 아니라 악이 득세하고 선이 눌림을 당하는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말하는 악이 악이 아니고 선은 선이 아닙니다. 이 세상 자체가 ‘악’입니다. 그래서 10절 마지막에 ‘이것도 헛되니라’라고 중간결론을 맺죠. 16절에도 마지막에 ‘무엇이 유익하랴?’ 즉, 이것도 헛되다고 중간결론을 맺습니다. 

 그런데 18절 부터는 조금 뉘앙스가 다르죠? 18절 상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그래서 7-17절까지는 인본주의 삶을 거론하시면서 ‘다 헛되다’라고 하신 후 18절 부터는 ‘그러나 이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것(복음)은~~’ 으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약간 의문이 들죠? 이 책의 저자인 솔로몬은 이 ‘하나님이 주신 바’를 복음으로 생각하고 적은 것 같지는 않죠? 맞습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복음으로 생각하고 적었는지, 아니면 다른 것을 생각하고 적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솔로몬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말씀이 기록된 순간 이것은 솔로몬과 하등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의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을 보면, 평생 먹고, 마시고,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나온 ‘낙’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몫이라고 나오죠. 즉, 태초에 이미 구원받을 백성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의 몫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것은 19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다시 강조하죠. 

 물론 솔로몬은 19절에서 이것을 하나님이 준 ‘재물과 부요’라고 표현을 했죠. 이것이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자들의 한계입니다. 장님에게 벚꽃을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한계가 뚜렷하죠. 그러나 그 벚꽃의 존재를 알긴 아는 자이긴 하죠. 그러나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직접 본 자들(성경이 완성된 이후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직접 본 자들입니다.)은 벚꽃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냥 봐서 아는 자가 되죠. 

 그래서 솔로몬이 너무나 귀중한 하나님의 선물을 무엇을 표현해야하나? 하고 궁리한 끝에 ‘재물과 부요’로 표현을 했지만 귀중한 것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 혹은 복음이라고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래서 20절 결론을 보면, 이렇게 귀중한 복음, 즉 예수님을 받은 자들은 ‘자기의 생명의 날’ 즉, 죽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복음만을 기뻐한다고 표현된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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