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일부완료)

요청(전도서 6장)

은혜바라기 2023. 3. 24. 17:49

 6장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의 사람이 나옵니다. 2절을 보면, 부족함 없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은 자가 나오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누린다고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구약 이스라엘’ 의 이야기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말씀을 준 백성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받은 자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죠. 그래서 그들은 그 예수님의 복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 즉 우리가 그 복음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었죠. 그래서 구약시대에 말씀을 준 이스라엘도 결국 헛된 것이라고 2절 말미에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과 결론이 1절에서 불행한 일, 마음이 무거운 일이라고 표현하셨죠. 

 이것을 3절에서도 다른 표현을 쓰셔서 똑같이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낙태된 자’보다 못하다고 나오죠. 여기서 낙태된 자라는 의미는 아애 역사 속에서 말씀을 보지도 못하고 죽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우리의 조상들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그런데 이 구약 이스라엘 같은 존재들은 이 낙태한 존재보다도 못하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6절을 보면, 그가 천년의 갑절을 살아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다 ‘한 곳’으로 간다고 나오죠. 여기서 ‘행복’이 ‘복음’이고 ‘한 곳’은 ‘지옥’입니다. 계속 같은 것을 설명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제가 말씀드린 ‘구약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바로 ‘종교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크리스찬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말씀을 듣게 되죠. 이렇게 말씀을 듣게 되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재물, 부요, 존귀, 장수’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표현 할 수 있는 “최고의 것”)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받은 자라도 결국 ‘복음’을 알지 못하면, 즉 참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 모두 헛 것이라는 뜻입니다. 

 7절, 사람이 입을 위해 수고하지만 결코 영원히 식욕을 잠재울 수는 없죠. 즉, 그 이 세상의 수고가 그 만큼 헛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알 수 없다면,...)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왜 사람이 음식을 먹어서 생명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창조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음식은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계속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입의 즐거움’을 위해 수고한다면 그 수고는 헛된 것, 즉, (영원히) 식욕도 잠재 울 수 없는 헛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8절은 번역이 조금 어렵게 나왔죠? 쉽게 번역을 해드리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데 있어서 똑똑한 것이 우매한 것보다 좋을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니 조금 부족해서 부연 설명이 붙어 있죠. 그런데 그것도 번역이 어렵습니다. 쉽게 번역하면, 지식만 잔뜩 안다고 해도 가난하다면 유익할게 없다는 부연설명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똑똑해도 가난하면 의미없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다시 9절과도 연결됩니다. 9절까지 연결을 시키면, 똑똑해도 가난하면 의미없기 때문에 똑똑한 자들처럼 공상을 할 바애는 차라리 우매자들 처럼  눈으로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둘 다 헛되다는 것으로 결론짓죠. 

 7-9절까지를 복음적인 해석으로 보면, 이 세상의 노력이나 이 세상의 지혜, 지식들이 모두 유익할 것 같지만 복음을 알지 못하면 모두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이 해석은 어렵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죠? 이 세상은 온통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인데 그 목적인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면 그 도구는 모두 헛된 것일 뿐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가 전도서의 전체 주제죠.

 그래서 10절은 이 부분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인 바 되었다'는 뜻은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은 이미 그의 이름, 즉 그 정체성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설명하기 위한 정체성, 그 도구로써의 쓰임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나와 있죠. 그래서 자기 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강한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입니다. 

 즉, 자기가 선택된 자인지, 유기된 자인지, 가룟 유다의 도구인지 베드로의 도구인지 정해졌지만 그것을 강한 자, 즉 하나님에게 따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좁게 해석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알려면, 우리회사 홍길동부장님 밑에서 박해를 당해야 된다는 것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모든 것이 복음을 중심으로, 즉 하나님을 기준으로 섭리되어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가 되는 것이죠. 

 11절은 총론격이고, 12절은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인생은 다 헛된 생명의 날, 혹은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낙’이 ‘복음’입니다.) 이후 12절 후반절은, 그가 죽은 후에는 이 땅의 복음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살고 있는 인생 동안 복음을 알아들어야한다는 뜻이죠. 

 편집없이 빨리 쓰느라 두서없네요. 읽으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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