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요셉에게 양식을 받은 형제들이 자루를 풀어보니 그 속에 ‘돈’이 들어 있습니다.
직전 묵상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그 무엇도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 받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요셉이 그 형제들의 돈을 자루에 돌려보냄’입니다. 자신들을 구원할 양식을 사기 위해 요셉에게 가져왔던 '돈'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은 오직 '요셉의 결정' 뿐이죠. 교회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딱 한 가지는 '예수님의 결정(십자가)'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대인사역으로 십자가 오른쪽 강도에게 '너는 나와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라는 '예수님의 결정'이 십자가라는 장소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 ‘돈’을 발견하는 장면은 교회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어떤 리엑션을 했을까요?
28절 중반절을 보면,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반절에는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재미있죠?
이것이 무엇을 설명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에피소드로 복음의 속성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교회는 그런 하나님을 오해하고 두려워 하며 떠는 모습을 보이죠. 즉, ‘교회들아~~ 구원에 있어서 너희의 수고와 노력은 필요 없단다~~’라고 설명을 하시는데, 인본주의 ‘GIVE AND TAKE’에 묶여 있는 교회는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며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분들이 많죠. 전부 복음에 눈을 뜨지 못한 종교인입니다. 즉, 나의 지극정성이 모자라 고통받는다, 혹은 고통받을 것이다 라는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복음에 눈을 뜨면, 나의 공로는 '0'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필요하게 되죠. 내가 예수님의 발을 닦는 것 (봉사)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발을 닦아야 한다는 것(희생)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말씀' 안에서 그 복음의 스토리를 들어야 하고 그저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한채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영적기쁨은 넘치게 되죠. 반대로 종교인들은 하루 성경 100장, 기도 3시간, 찬양 3시간, 작정 헌금 쌓기 경쟁을 합니다. 당장은 열띤 마음에 뿌듯하지만 뒤돌아서면 '영적 공허' 상태에 빠집니다. 언젠가 허물어질 바벨탑이기 때문이죠.
이후 29절을 보면, 이후 형제들은 가나안으로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모든 일을 소상히 말하죠. 여기서 보면, ‘정탐꾼 (스파이)’이라는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성경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는 그냥 넘기시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 반복은 하나님의 강조법이기 때문입니다.
왜 요셉은 이 형제들에게 ‘정탐꾼’이라고 했을까요? 영어로는 스파이(SPY)라고 나옵니다. 스파이의 속성은 다른 나라에 들어와서 살지만 사실은 그 나라 사람이 아닌 적대국 사람이죠. 선택받은 자들은 실제로 이 땅 인본주의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직전 묵상했던 말씀의 내용을 형제들이 반복합니다. 중요한 것 두 가지만 반복해서 의역하여 설명드리면, 첫째 예수님이 교회 대신 감옥(지옥)에 갇혔기 때문에 나머지 교회들은 양식(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과 둘째 막내 동생 (베냐민)으로 상징하는 성령께서 오셔야 그 형제를 풀어 준다(구원)고 합니다. 그 형제는 예수님 뿐 아니라 그 예수님의 품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의미합니다.
35절을 보면, 형제들이 오해했던 ‘돈’을 쏟아 내자 그들의 아버지 야곱도 두려워하죠. 36절부터 보면, 그 아버지 야곱도 자신의 아들들과 같은 오해를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 점을 강조하실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쉽게 헌금 이라고 할게요. )을 하나님은 절대 받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도 인간은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오해를 나열해 볼께요. ‘두려워한다.’ ‘요셉과 시므온을 잃게 한다.‘ ’베냐민도 빼앗아가서 잃게 한다‘ ’나를 해롭게 한다‘ ’재난이 미쳐 슬퍼하고 스올(지옥)로 내려가게 한다.‘ 고 하죠. 이것을 쉽게 의역해 드리죠.
인간은 내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예수님을 잃을까 두려워 합니다.’ ‘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성령 충만 받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헌금을 드리지 못하면 나에게 해가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헌금을 드리지 못하면 재난이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헌금을 드리지 못하면 결국 지옥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교'일뿐이죠. 우리는 종교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설명하고 계시는지 보이세요? 자기가 모시는 신에게 지극정성을 드리면 복을 받고 반대로 인색하면 해를 받는다는 인식은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의 공통점입니다. 이 부분에서 벗어난 종교는 절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본질이 인본주의 원리로 되어 있을 수밖에 없죠. 그런데 유일하게 참 기독교만이 이 원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그냥 기독교가 아니라 참 기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 기독교는 이것과 반대입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단다.’가 참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최초의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분리된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대로 말씀을 가지고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단다'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규례가 ‘안식일’이죠.
그런데 교회에 가면 정말 그런가요? 아니죠. 그래서 우리가 참석하는 기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니라 그냥 종교로써의 기독교입니다. 참 기독교, 즉 참 교회는 딱 1개뿐입니다. 예수님이시죠.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게 ‘발을 닦아 드릴게요.’라고 말하면, ‘너는 그러면 나와 상관없는 자가 된다.~~ 오직 내가 너의 발을 닦아 주는 것이란다~~’라고 하시죠. 이런 종교는 이 세상에서 만들 수가 없습니다.
" 요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어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세요?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야 하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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