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완료)

창43:1-15(23.06.30.금)

은혜바라기 2023. 6. 30. 08:5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오늘 말씀의 내용은 길지만 핵심은 매우 간단합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심하여 이스라엘(야곱)이 다시 애굽의 요셉에게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조건인 ‘베냐민 데리고 오기’를 두고 그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이 실랑이를 하는 장면입니다. 

 복음으로 해석을 하면, 요셉은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같은 어머니(몸)에서 난 베냐민은 성령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교회)이 요셉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동행해야 하는 장면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서만 주실 수가 있죠. 그런데 우리(교회)와 예수님의 연결고리는 오직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님의 견인하심으로만 예수님을 볼 수가 있고 오직 성령의 가르침으로만 복음을 알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에 대하여 묵상을 해 볼까요? 

 사실 ‘성령충만하라’라는 말씀은 모순되는 말입니다. 우리의 열심으로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라는 말씀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충만’이라는 단어를 어떤 측정단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을 조금만 받은 상태, 보통상태, 충만상태 이런 식으로 측정의 개념으로 잘못 생각하죠. 그런데 왜 성경은 이렇게 기록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인간의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쓰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도 태양이 뜬다.’라는 문장은 잘못된 문장입니다. 정확한 문장은 ‘오늘도 지구가 태양을 돌아서 태양을 보게 되었다’라는 문장이 맞는 문장이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도 태양이 뜬다’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말해야 듣는 자들이 훨씬 이해가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복음을 설명하실 때 이런 방식을 많이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라’는 말은 ‘성령께서 나에게 오셔서 나의 시야를 꽉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그 선언이 되어짐과 동시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죠. 즉, '우리가 성령충만 하기 위해 노력해라~~'라는 방향성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은 성령께서 그자들의 인생을 온전하게 견인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충만'에 대한 부분을 조금 더 알아볼까요? 에베소서를 보죠.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

 이 구절을 인본주의 종교식으로 설교를 하게 되면, ‘술집 가서 술 먹고 비틀비틀 되지 마세요. 그것은 방탕한 것이므로 교회에 와서 말씀과 찬양을 많이 불러서 성령을 마음에 충만하게 채우세요. ’라고 하죠. 이런 설교는 종교적, 교훈적일 찌는 몰라도 전혀 복음적이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말한 ‘술’은 인본주의를 가리킵니다. 인본주의가 주는 즐거움, 행복, 성공 등에 묶여 버리면 사람은 계속 그것을 더 찾고 또 찾게 됩니다. 그 속성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술’입니다. 성경은 절대 술을 먹지 말라는 말이 없습니다. 심지어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포도주와 독주를 먹고 찬양을 드리라는 구절까지 나오죠. 차치하고서라도, 성경은 ‘행위를 요구하는 책’이 아닙니다. 복음을 설명하는 책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술'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지금 '인본주의' 그 자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택받지 못한 유기된 자들은 '행위'에 갇혀서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 본질을 명하는 '상징'에 갇히게 되죠. 그래서 그들은  '술 먹지 말기' = '훌륭한 신앙인 되기'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 나온 ‘방탕’이라는 단어를 히브리 사전을 보면 ‘낭비’라는 뜻입니다. 즉, 선택된 자들이 이 세상에 ‘인생’이라는 이름으로 역사 속에 내동댕이 쳐진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에 묶여 있으면 (속성상, 술에 취해 있는 것 같이...  인본주의에 묶여서 그것만 바라보고 있으면... ) 그 자는 복음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는 시간이 되죠. 그래서 이 시간을 하나님의 방향에서 보면 ‘낭비’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탕’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연결해서 해석하면, "너희들이 잘 이해할 만한 예를 들어 술 취하는 것 같은 속성을 가진 인본주의에 묶여 있으면 그 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이란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인본주의와 분리하여 복음을 보게 할 것이란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이 작업은 사실상 선택받은 자들의 탄생부터 관여하고 계시죠. (우리가 그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이 엡 5:18절 이후 바로 나온 엡 5:19절부터 보면, 

 “엡5: 19-2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우리가 엡5:19-21절과 같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셔서 복음을 알게 하시면 우리가 이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견인하여 가신다는 것이죠. 

 다시 창세기 본문을 돌아가면, 결국 야곱은 베냐민을 요셉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각종 예물과 갑절의 돈을 준비하죠. 각종 예물의 성격을 보면, 대부분 장례용품입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어야 교회가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갑절의 돈’도 준비하죠. 나중에 나오지만 결국 요셉은 이 돈도 처음과 같이 돌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과 ‘예수님의 죽음’만 필요하다고 계속 말씀하시는데 교회는 ‘그래도 나는 헌금을 드려서 나의 구원에 숟가락을 얹을 것이야~~’라고 끝끝내 고집(갑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절의 돈’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헌금에서 자유로워지죠.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가슴 깊은 곳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갑절의 돈’ 즉, 2라는 증명의 숫자가 가리키는  돈, 즉 인간은 이 돈의 위력을 끝끝내 교회에서, 인생에서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선택받은 자들이나 유기된 자들이나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이런 '나'를 복음으로 들여다보면서, "이래서 예수님이 죽으실 수밖에 없구나~~ 이래서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없구나~~ 이래서 나는 나의 힘으로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 그냥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로구나~~"의 방향성에 서게 되죠.  

 

P.S
( 홈페이지 처음에 보면, 지난 묵상과 특별 묵상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실 때마다 묵상하세요. 핸드폰에서는 첫 화면 중간에 보시면 “분류 전체 보기”를 보시면 됩니다. )

 매주 금요일은 전도에 대한 반복 메시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시고 그냥 살아가시다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눈에 들어오면 이 묵상을 권해 주세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 주세요.(이 말씀의 뜻은 '아무 때나 무조건‘ 전하라는 말이 아니라 "전도는 인본주의를 고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복음은 설득과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들의 모습은 매우 동일합니다. 길을 잃어버려서 마음이 가난해져서 애통한 상태죠. 즉,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고 애통한 상태에 놓여 있죠.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복된 모습'입니다. 복음(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설교, 외롭지 않은 교회 활동, 나의 가치를 높이는 봉사와 기부활동을 통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지만 잃어버린 양들은 '참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텅 빈 가난함'을 인식하죠.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모순됨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막혀 있는 곳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오직 삶(인생과 신앙)의 가치를 잃어버린 여러분의 참 형제를 찾아 이 글을 권해주세요. 그들이 결국 영원한 천국에서 여러분의 참 형제요, 자매가 되실 분입니다. 그날을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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