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완료)

창42:9-17(23.06.27.화)

은혜바라기 2023. 6. 27. 08:46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어제 묵상을 요약하면, 요셉의 형제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에 있는 그들의 아우 요셉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형들을 알아보는데 그 형들은 요셉을 못 알아보죠.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듣고 배운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는 한 절대 그분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방향성에서만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연결된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로 시작을 합니다. 이후 요셉은 그 형제들은 계속 핍박을 합니다. 꿈을 꾼 것을 생각하고 핍박을 왜 시작할까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맥락일까요?

 요셉의 꿈을 최종적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 백성(요셉의 형제들과 그 부모)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입니다. 그런데 이미 어제 본문 6절 하반절을 보면, ‘땅에 엎으려 절하매’라고 나와 있죠. 그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꿈을 생각하고’라는 뜻은 요셉의 꿈이 정말로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요셉이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 부터는 요셉의 진심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요셉이 그 꿈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그 형제들을 골려주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를 죽이려 했던 그 형제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 것이지 그런 요셉의 진심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은 요셉의 선(?), 악(?)의 진심과 상관없이 그의 행위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너희는 정탐꾼이다’라는 거짓 자백을 요구하죠. 그러나 그 형제들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자신들의 과거 상황을 변명하듯 꺼내 놓습니다. 자신들은 원래 12형제였는데 막내는 아버지와 함께 있고 다른 하나는 없어졌다는 말을 합니다.  이에 요셉은 이들에게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막내를 데려오게 하고 나머지는 갇혀 있으라’고 합니다. 이후 다 함께 삼일을 가두죠. 

 이 부분을 복음으로 해석을 해보죠. 12라는 숫자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땅(4)에서 복음(3)을 알게 된 자들(4곱하기 3)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의 형제들은 12명이 아니죠. 즉,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요셉과 성령을 상징하는 베냐민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을 '정탐꾼'이라고 지칭했죠. 이 뜻은 교회는 이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본주의  세상 속에서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감옥에 3일을 갇혀 있다가 풀려나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것과 같은 의미인데 이 의미의 주된 본질은 선택받은 자들이 이 땅에 영적으로 죽은 자(죄인)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즉, 영적으로는 선택받은 자들이 복음을 모르고 사는 동안의 삶을 '무덤(감옥)'이라고 할 수 있죠. 이것을 예수님께서 3일 동안의 죽음으로 표현을 하신 것이고 이 예수님의 3일의 죽음을 미리 설명하는 것이 지금 요셉의 형제들이 3일 동안 감옥에 잠시 갇혔다가 풀려나는 모습입니다. 전부 복음을 반복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눈을 뜨게 되면 이 세상은 성경도, 역사도, 인생도 모두 복음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과 성령님이 빠져 있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이 땅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후 성령님(베냐민)을 반듯이 데려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반듯이 성령께서 견인하여 가는 구조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죠. 우리의 힘과 노력과 공로는 그 가치가 '0'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심지어 '성령충만'조차 노력을 해서 받으려고 하죠. 40일을 금식하고, 기도를 쌓고, 심지어 찬양을 진 빠질 때까지 불러재끼면서 '강신'의 노력을 하죠. 그리고 일반적인 노래를 불러도 마음에 풍만한 감정이 들어가게 만드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가지고 '나는 성령 충만 받았다.'라고 착각을 합니다. 사탄이 교회를 어느 정도까지 가지고 노는지 아시겠죠? 그러나 선택받은 자들은 결국 이런 것에서 벗어납니다. 오직 진리의 눈을 가지고 복음을 보게 되죠. '성령충만 받아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나의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것을 알죠. 그리고 하나님의 선언은 이미 이루어진 응답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이미 부모의 태중에 있을 때 부터 '성령충만'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즉, 부모, 나라, 기타 환경 등등 그 모든 것을 머리카락을 세신 바와 같은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견인하시는 것이죠. 

 3일 후 요셉은 이들을 일단 풀어줍니다. 나중에 보면, 시므온만 대표로 가두고 나머지는 돌려보냅니다. 이때는 시므온이 잠시 예수님의 표지판이 됩니다. 시므온이 그들의 대표로 감옥에 갇혀 있는 대신 그들은 양식을 얻어서 가나안에 있는 야곱에게로 가게 되죠. 이것을 복음으로 해석하면, 예수님께서 대표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가로 나머지 교회는 구원(양식)을 얻어 천국(가나안)에 있는 하나님(야곱)께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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