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완료)

창43:31-34(23.07.04.화)

은혜바라기 2023. 7. 4. 08:49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요셉이 베냐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울고 난 후 얼굴을 씻고 나오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표지판이고 베냐민은 성령님을 상징하기도 하고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조금 세밀하게 말씀드리면, 베냐민은 ‘성령께서 견인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된 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묘사한 것이죠. 너무 사랑하여 우셨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우셨죠. 

 이후 요셉은 그들에게 음식을 차립니다. 우리 나라는 ‘식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먹을 식 입 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같이 밥을 먹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즉, 한몸원리를 가리킵니다. 

 “시편23편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 시편23편에서 나온 ‘상’이 바로 ‘밥상’입니다. 즉,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과 함께 먹는 밥상’을 의미합니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고 넘친다는 것은 ‘충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을 의미하죠. 그래서 이 구절은 성령께서 나를 온전하게 견인하셔서 결국 하나님과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는 관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관계에 관한 이야기죠. 

 하지만 오늘의 말씀에 보면, 애굽사람과 형제들의 밥상이 따로 차려집니다. ‘분리’입니다.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이 땅에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입니다. 순례자죠. 그들은 언제든 구름기둥이 옮겨가면 따라서 옮겨가는 순례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절대 이 땅에 무엇을 심고 그것을 통해 결실을 맺고 그 결실에 매여 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즉, 자기의 꿈(비전)을 이루는 삶을 살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 요셉도 음식이 따로 차려진 것은 아직 예수님과 교회가 ‘한몸'이 되지 않은 시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원래는 한몸이지만 한몸이 아닌 시간에 대한 설명입니다. -- 우리의 신앙과정을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

 선택받은 자들이 노년을 위해 저축을 하면서 산다?? 이것은 완벽하게 이율배반적인 행위일수 밖에 없습니다. 선택받은 자들 중 목사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퇴직금을 걱정하고 성도는 그 목사의 퇴직금을 걱정한다?? 이것도 완벽하게 이율배반적인 행위일 수 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퇴직금을 받는 것 자체가 복음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모순이죠. 

 그러면 목사가 퇴직 후 무엇을 먹고 사냐? 고 묻겠죠. 그런데 이 ‘염려’를 잘 묵상해보세요. 이 염려가 당연한 염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아직 복음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본은 우리가 ‘마음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가 상실되는 것이죠. 그래서 비참함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는 방향성을 유지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가르치는 목사가 ‘노년을 걱정하고 퇴직금을 걱정한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축을 끊고 모두 기부하고 더 나아가서 보험도 끊고 다 기부하고 더 나아가서 1년짜리 자동차 종합 보험도 끊고 사고 나면 사고 나는 대로 망하리라~~~ 는 생각을 하는 것이 맞겠죠? 그런데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실천하면서 ‘나는 완벽한 신앙인이다~~’ 의 방향성을 유지했죠. 

 같은 시각으로 목사의 방향성에서 예를 들면, 목사는 퇴직금을 거부하고 그냥 퇴직한 후 종이줍기라도 하면서 비참하게 사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을 비참하다고 보는 시각이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목사가 있다고 해도, 그 목사는 이런 삶을 유지하면서 ‘나는 죽을 때 까지 올바른 목사의 삶을 노력했다~~’라는 방향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결국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 될 뿐이라는 것이죠. 이 정도 되니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어렵죠? 

 그래서 복음은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선택(기억)‘의 문제일 뿐입니다. 나는 내일을 위해 일을 하고 앞날을 걱정하면서 저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염려하지 말라. 모든 염려는 주께 맡기라고 하죠. 이 모순된 구조에서 결코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우리의 옛 자아의 몸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자아로써의 나는 성령께서 견인하여 끌고 가시면서 계속 예수님의 시야를 공유하여 복음으로 이런 모순된 나를 보게 하시죠. (이렇게 나를 두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택받은 백성 밖에는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정한(순결한) 짐승'이 나오죠. 되새김질을 하면서 굽이 나누어진 짐승을 말합니다. 짐승의 발은 '길'을 걷는데 사용되죠. '길을 걷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발굽이 둘로 갈라져 있다는 뜻은 그 길을 '인본주의'와 '복음'으로 둘로 분리하여 보고 , 들을 수 있는다는 것을 의미하죠. 또한 되새김질을 한다는 것은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 바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꺼내서 그 본질인 복음으로 다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말씀은 늘 두 번의 해석을 해야합니다. 1차적으로는 문자적, 역사적, 문학적, 교훈적, 종교적인 해석이죠. 이후 그것을 되새김질하여 복음으로 가공하는 것은 오직 선택받은 백성(정한 짐승)에게만 해당됩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복음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자들과 그냥 놔두는 자(유기된 자)로 나누시죠. 그래서 선택된 자들은 이렇게 모순된 나를 보면서 ’나는 예수님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의 방향성을 유지하게 하시는 것이고 유기된 자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통장을 보면서 살게 되죠.

 

 그래서 복음의 길을 계속 걷다 보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나는 나의 옛 자아로 살아가는 나를 이상한 놈으로 보게 되고, 이후 나를 죄인으로 보게 되고 이후 나를 죄인 중의 괴수로 보게 되고 이후 나를 죽은 자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괴롭죠. 그래서 나를 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게 되죠. 

 다시 본문으로 가면, 요셉은 그 형제들을 나이에 따라 앉혔죠. 즉, 예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다는 구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들 보다 베냐민에게 5배 더 많은 음식을 주죠. 성경에서 5는 말씀(율법)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다시 종합해서 해석을 하면, 성령께서 견인하여 교회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은 오직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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